[기업속으로] 한국도자기(주) … 이젠 보석박힌 도자기까지 … 세계5위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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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미국 애틀랜타 국제 도자기쇼.세계 도자기 업체의 '올림픽'으로 통하던 이 행사에 한 한국인 도자기 회사 사장이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이전 15년 동안 경영을 맡으며 회사 도자기 품질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그는 회사 우수 제품들 가운데서도 엄선한 출품작,그리고 최고급 양복과 새 넥타이와 함께 애틀랜타 땅을 밟았다.
당시 국제도자기쇼에서는 미국 유수 일간지 기자들이 200개 출품작에 대해 일일이 점수를 매겨 개막식에서 전체 순위를 발표했다.
그는 초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젖은 채 심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행사 막바지께 드디어 발표된 심사 결과.그의 얼굴은 구겨진 껌종이처럼 일그러졌다.
자기 회사의 제품이 200개 출품작 가운데 200등을 기록한 것.꼴찌였다.
이날 전시장 부스에 들른 사람들은 판매 상담은커녕 "넘버 투헌드렛!"만 연발했다.
그는 귀국행 비행기에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비웃음을 감탄으로 바꾸고 말겠다"고.그리고 29년이 흐른 현재,그의 회사는 세계 5대 도자기 메이커로 성장했다.
한국도자기는 세계 56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국내외 9개의 공장에서 매달 생산하는 도자기 수가 340만여개에 달한다.
지난해 매출은 799억원으로 세계 5위였지만 생산량은 1위였다.
최근에는 세계 최초로 보석이 박힌 고급도자기 '프라우나 주얼리'를 선보여 세계 도자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동수 회장은 "프라우나 주얼리를 앞세워 2010년에는 현재의 두 배 수준인 15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도자기는 1943년 충북 청주에서 충북제도사란 이름으로 출발했다.
1960년 유통망을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한국도자기로 개명했다.
국내 도자기 업계에서 'One of them'에 불과했던 한국도자기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63년 '황실장미 홈세트'를 내놓으면서부터다.
이 제품은 영국 도자기 회사인 로열덜튼과 제휴해 개발한 국내 최초의 홈세트 패키지였다.
한국도자기는 국내 도자기 업계로는 최초로 TV 광고를 내보내는 등 이 제품에 대한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그 결과 황실장미 홈세트는 회사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한국도자기를 일약 '스타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한국도자기는 1973년 결정적인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당시 '도자기 기술의 결정체'로 꼽히던 본차이나를 국산화한 것.김 회장은 1973년 3월 육영수 여사의 초대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육 여사는 "청와대에서 쓰는 식기가 모두 일제인데 우리나라에서 본차이나를 만들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김 회장은 로열덜튼과 기술제휴를 통해 9개월 만에 본차이나를 개발,디너 세트와 커피세트 3벌씩을 청와대에 보냈다.
본차이나는 출시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각 해외공관과 국내 유수 호텔에 공급됐다.
당시는 오일쇼크가 터져 경쟁업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는 상황이었다.
한국도자기는 그러나 본차이나 판매로 오히려 성장을 가속화해 이틈에 업계 정상자리에 올랐다.
한국도자기는 세계시장 공략에도 본격 나섰다.
그러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1976년 수출액이 86만달러에 그쳤고 이마저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 판매가 많았다.
애틀랜타 국제도자기쇼에서의 참패는 세계 시장에서 한국도자기의 현주소를 알게 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국도자기는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일본 상고(春日) 차이나,노리다케,영국 크레스콘사 등 세계적인 기업들과 기술제휴를 맺었다.
특히 크레스콘사에서 전문기술자를 기술고문으로 초빙해 본차이나의 품질 강화에 주력했다.
세계 시장은 곧 한국도자기의 기술 개발에 반응을 보였다.
1979년 한국도자기 수출액은 3년 전인 1976년의 6배에 달하는 500만달러에 이르렀다.
애틀랜타 국제도자기쇼에서도 한국도자기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1984년 또 다시 참가한 국제도자기쇼에서 한국도자기는 420개사 가운데 20위를 차지했다.
제품 판매 계약에서는 다른 모든 기업들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세계적인 권위지 시카고 트리뷴은 한국도자기를 '도자기의 여왕'으로 칭하며 대서특필했다.
김 회장의 다짐대로 '비웃음'이 '감탄'으로 바뀐 것.같은 해 한국도자기 수출액은 1000만달러를 돌파했다.
국내 도자기 업계는 최근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저가 제품은 중국산이,고가 제품은 유럽산이 몰려와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상황이다.
한국도자기도 중국산과 유럽산의 협공으로 2002년 이후 성장 정체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도자기는 이 위기를 디자인 및 기능성 강화를 통한 제품 고급화로 돌파한다는 계획이다.
한국도자기는 2003년 고급 도자기 브랜드 '프라우나'를 선보이며 세계 명품 도자기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프라우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 6명이 개발에 참여해 예술성 향상에 주안점을 둔 작품.국내 최초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세계 소비재 박람회에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참가해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이달에는 프라우나에 보석이 박혀 가격이 기존 고급 도자기의 1.5~2배에 달하는 '프라우나 주얼리'가 출시될 예정이다.
한국도자기는 올해 프라우나 주얼리로만 수출 50억원을 포함,1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또 2004년 세계에 처음 선보인 은나노 항균 도자기 판매도 확대해 나간다는 목표다.
이에 따라 올해 전체 매출도 지난해보다 10%가량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 회장은 "내년부터는 저가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중·고가 제품 판매에 주력할 것"이라며 "명품 도자기 회사로 거듭나 생산량 뿐만 아니라 매출에서도 세계 톱을 노릴 것"이라고 말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
그는 이전 15년 동안 경영을 맡으며 회사 도자기 품질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그는 회사 우수 제품들 가운데서도 엄선한 출품작,그리고 최고급 양복과 새 넥타이와 함께 애틀랜타 땅을 밟았다.
당시 국제도자기쇼에서는 미국 유수 일간지 기자들이 200개 출품작에 대해 일일이 점수를 매겨 개막식에서 전체 순위를 발표했다.
그는 초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젖은 채 심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행사 막바지께 드디어 발표된 심사 결과.그의 얼굴은 구겨진 껌종이처럼 일그러졌다.
자기 회사의 제품이 200개 출품작 가운데 200등을 기록한 것.꼴찌였다.
이날 전시장 부스에 들른 사람들은 판매 상담은커녕 "넘버 투헌드렛!"만 연발했다.
그는 귀국행 비행기에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비웃음을 감탄으로 바꾸고 말겠다"고.그리고 29년이 흐른 현재,그의 회사는 세계 5대 도자기 메이커로 성장했다.
한국도자기는 세계 56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국내외 9개의 공장에서 매달 생산하는 도자기 수가 340만여개에 달한다.
지난해 매출은 799억원으로 세계 5위였지만 생산량은 1위였다.
최근에는 세계 최초로 보석이 박힌 고급도자기 '프라우나 주얼리'를 선보여 세계 도자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동수 회장은 "프라우나 주얼리를 앞세워 2010년에는 현재의 두 배 수준인 15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도자기는 1943년 충북 청주에서 충북제도사란 이름으로 출발했다.
1960년 유통망을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한국도자기로 개명했다.
국내 도자기 업계에서 'One of them'에 불과했던 한국도자기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63년 '황실장미 홈세트'를 내놓으면서부터다.
이 제품은 영국 도자기 회사인 로열덜튼과 제휴해 개발한 국내 최초의 홈세트 패키지였다.
한국도자기는 국내 도자기 업계로는 최초로 TV 광고를 내보내는 등 이 제품에 대한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그 결과 황실장미 홈세트는 회사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한국도자기를 일약 '스타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한국도자기는 1973년 결정적인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당시 '도자기 기술의 결정체'로 꼽히던 본차이나를 국산화한 것.김 회장은 1973년 3월 육영수 여사의 초대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육 여사는 "청와대에서 쓰는 식기가 모두 일제인데 우리나라에서 본차이나를 만들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김 회장은 로열덜튼과 기술제휴를 통해 9개월 만에 본차이나를 개발,디너 세트와 커피세트 3벌씩을 청와대에 보냈다.
본차이나는 출시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각 해외공관과 국내 유수 호텔에 공급됐다.
당시는 오일쇼크가 터져 경쟁업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는 상황이었다.
한국도자기는 그러나 본차이나 판매로 오히려 성장을 가속화해 이틈에 업계 정상자리에 올랐다.
한국도자기는 세계시장 공략에도 본격 나섰다.
그러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1976년 수출액이 86만달러에 그쳤고 이마저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 판매가 많았다.
애틀랜타 국제도자기쇼에서의 참패는 세계 시장에서 한국도자기의 현주소를 알게 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국도자기는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일본 상고(春日) 차이나,노리다케,영국 크레스콘사 등 세계적인 기업들과 기술제휴를 맺었다.
특히 크레스콘사에서 전문기술자를 기술고문으로 초빙해 본차이나의 품질 강화에 주력했다.
세계 시장은 곧 한국도자기의 기술 개발에 반응을 보였다.
1979년 한국도자기 수출액은 3년 전인 1976년의 6배에 달하는 500만달러에 이르렀다.
애틀랜타 국제도자기쇼에서도 한국도자기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1984년 또 다시 참가한 국제도자기쇼에서 한국도자기는 420개사 가운데 20위를 차지했다.
제품 판매 계약에서는 다른 모든 기업들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세계적인 권위지 시카고 트리뷴은 한국도자기를 '도자기의 여왕'으로 칭하며 대서특필했다.
김 회장의 다짐대로 '비웃음'이 '감탄'으로 바뀐 것.같은 해 한국도자기 수출액은 1000만달러를 돌파했다.
국내 도자기 업계는 최근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저가 제품은 중국산이,고가 제품은 유럽산이 몰려와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상황이다.
한국도자기도 중국산과 유럽산의 협공으로 2002년 이후 성장 정체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도자기는 이 위기를 디자인 및 기능성 강화를 통한 제품 고급화로 돌파한다는 계획이다.
한국도자기는 2003년 고급 도자기 브랜드 '프라우나'를 선보이며 세계 명품 도자기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프라우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 6명이 개발에 참여해 예술성 향상에 주안점을 둔 작품.국내 최초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세계 소비재 박람회에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참가해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이달에는 프라우나에 보석이 박혀 가격이 기존 고급 도자기의 1.5~2배에 달하는 '프라우나 주얼리'가 출시될 예정이다.
한국도자기는 올해 프라우나 주얼리로만 수출 50억원을 포함,1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또 2004년 세계에 처음 선보인 은나노 항균 도자기 판매도 확대해 나간다는 목표다.
이에 따라 올해 전체 매출도 지난해보다 10%가량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 회장은 "내년부터는 저가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중·고가 제품 판매에 주력할 것"이라며 "명품 도자기 회사로 거듭나 생산량 뿐만 아니라 매출에서도 세계 톱을 노릴 것"이라고 말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