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들과 지겹게 싸워대던 언니가 돌파구를 찾았다.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시기이니 한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떨치지 못하던 언니가 마침내 아들을 방치하게 된 것이다. 뜻밖에도 그 이유는 TV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탤런트를 바라보며 언니는 완전히 넋을 잃고 있었다.
이유 없는 반항과 이유 있는 간섭이 팽팽하게 맞서던 모자의 대치 상태는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인터넷에서 팬 카페를 섭렵하고 드라마 폐인들과 커뮤니티 활동을 하느라 종일 바쁜 엄마를 보면서 아들은 반찬이나 좀 제대로 만들어 달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엄마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럽다며 그저 내버려 둬 달라던 아들로서는 전세 역전의 상황이었다.
결혼 8년 만에 어렵게 얻어 유난히 애지중지 키웠던 아들이었다. 그만큼 언니는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간섭도 심한 편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아들은 더욱더 엄마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들의 사춘기와 함께 시작된 모자의 충돌은 아무리 봐도 엄마의 무관심 이외에는 해답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금쪽 같은 아들이 공부도 작파(作破)하고 사사건건 엄마에게 대들기만 하는데 그걸 어찌 두고 보기만 한단 말인가. 자식에 대해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라고 얘기들은 하지만,멀쩡한 인간의 절절한 마음을 대체 어떻게 한순간에 비울 수 있단 말인지….
결국 언니의 마음은 비워지지 않았으나 그 대신 다른 것이 밀려 들어와 원래의 마음을 밀어낸 셈이었다. 온갖 취미 생활에 몰두해 봐도 그때 잠시뿐 도무지 마음이 비워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던 언니였는데…. 실연으로 인한 상처는 오직 새로운 연애로만 치유될 수 있다고 하더니…. 그렇다면 언니는 그동안 아들과 연애를 해왔다는 말일까? 그 탤런트는 언니의 새로운 애인? 그렇다면… 형부는?
새로운 애인에 대해서 말하는 언니의 목소리는 살짝 들떠 있었다. 얼굴에는 홍조마저 감돌았다. 도대체 저 사춘기가 언제 끝날지 궁금하다며 짜증을 내던 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도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이 없고 변변한 연애조차 해본 적 없는 모범생 언니였기에 그 변화는 놀랍고도 흥미로웠다.
남편이 외국에서 일하는 동안 혼자 아이를 키웠기에 언니는 아들에게 더더욱 각별했다. 몇 년간 남편 곁으로 가서 살 때에도 낯선 땅에서 어린 아들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탓에 언니는 아들과 더욱 애착 관계를 형성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들은 어느덧 훌쩍 자라서 그 관계를 부담스러워하고,돈 벌고 아이 키우느라 서로 바빴던 부부는 어느덧 서로 데면데면해져 있고….
언니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데 문득 슬픔을 닮은 감정이 밀려든다. 시간이 흐른 뒤에 내 모습 또한 저리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젊은 한류 스타에 열광하는 일본의 중년 주부들을 보면서 언니와 내가 키득거렸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인데…. 드라마가 끝나자 그 배경이 된 촬영지를 여행하는 언니를 보면서 나는 불현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되어버린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그리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열정의 절대량. 그것을 어떤 때 무엇을 향해 쏟아붓느냐에 따라 인생의 명암은 갈라진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최선의 것을 향해 집중하지만 그 방향과 순간은 운명처럼 자주 어긋나곤 한다. 남편은 아내보다 일에 몰두하고,아내는 남편보다 아들에 몰두하고,아들은 그저 바깥 세상만 기웃거리고….
그렇게 지나가버린 인생,건강이 나빠진 이후에야 귀국해서 함께 살게 된 남편,엄마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굴다가 태도가 돌변한 아들.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언니는 TV 스타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화면 속에서 박제된 꽃과 같은 그 청년에게? 입학식으로 꽃이 넘쳐나는 새봄의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거듭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