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맞다! 악덕 고리대만큼이나 경제 정의에 반하는 장사도 없다. 궁지에 몰린 서민들에게 무려 연 300%가 넘는 이자를 뜯어내고 장기를 뽑아 팔거나 인신매매 조건까지 붙인다니 천하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생명 없는 돈이 자식(이자)을 잉태하는 이 더러운 직업을 규탄하는 다음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고리대금업자는 악에 깊이 물든 도둑들이다. 타인의 자양분을 먹어치우고 타인의 재산을 훔치는 것은 살인자와 다르지 않다. 마땅히 다리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야 한다." 이 거친 목소리의 주인공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다. 그는 거열형에 처해야 할 집단으로 유대인을 지목했다. "그들의 본거지를 박살내고 집시처럼 떠돌게 해야 한다. 이 유해한 독기를 지닌 벌레들을 강제노동에 몰아넣어 박멸해야 한다."

역사의 장면 어디에선가 익히 들어보았던 격렬한 구호다. 중세 프랑스의 한 조사에 의하면 시골사람의 43%, 도시사람의 65%가 유대인 고리대금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셰익스피어조차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샤일록을 그토록 비난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살덩이 1파운드를 떼어내되 절대로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는 판결에 박수를 쳤던 대중정서가 모여 소위 '역사적 정의'로 넘쳐흘렀고,그것의 종착역인 나치즘은 결국 인류사의 가장 큰 죄악인 유대인 대학살로 치달았던 거다. 위선적 정의는 처음부터 희생양이 필요하다. 어떻든 중세 기독교는 이자를 금지했고 이방인이었던 유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금지된 사업밖에 없었다. 출애굽기는 "너희가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빚 갚기를 재촉해서도 안되고 이자를 받아서도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속의 다른 장면(신명기)은 "이방인들에게는 이자를 받아도 좋다"고 했으니 유대인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생업을 영위했다. 이슬람은 지금까지도 이자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위선은 위선일 뿐이다. 이자 대신 배당금을 받거나 이방인을 중간에 세워 돈을 빌려주면서 실질 이자는 더욱 높아지는 역설들이 '어디서나' 그리고 '반드시' 나타나곤 했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유례없는 8·3조치를 발동하면서까지 사채를 막았지만 고리대는 지금껏 사라져 본 적이 없다. 시대에 따라 오르내리는 이자율 또한 언제나 채무자의 숨이 턱에 닿는 바로 그 선이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궁벽한 처지의 역함수'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는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당시 이자수준이 연 50%를 웃돌았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개항기에 들면 월 10%로 또 두 배나 뛰어올랐다. 경제가 파탄날 때 고리대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은 일종의 자연법칙이다.

지난주 국회는 이자를 연 40%로 제한하는 이자제한법을 통과시켰다. 서민 구제라는 아름다운 명분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다. 김석동 재경부 차관은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분야에서의 불가피한 개입"이라고 둘러댔고…. 그러나 이자제한법을 과연 정의롭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일자리 아닌 실업자가 흘러넘치고 600만 자영업자들이 매일매일 부도직전의 절벽 위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어디서도 급전을 빌릴 수 없게 된 결과가 바로 지금의 사채업이다. 이제 와서 고리대를 금지한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면 이 정부는 뇌가 있는 것인가. 서민들은 급전을 빌려 그나마의 버티기를 시도했던 한두 달의 여유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 분명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반(反)시장 법률 운운할 가치조차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가 나쁘다는 말을 들으면 짜증이 난다"고 말했지만 경제가 파탄났기에 300% 고리채가 횡행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짜증을 낼 것인가. 이자제한법은 한줌의 악덕업자들에게 서민경제 파탄의 책임을 돌리는 꼴이다. 온 국민을 상대로 다락같은 수수료를 물리고 사실상의 금리 담합을 통해 수조원씩의 이익을 짜내는 은행에 대해서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인 이 나라 정부다. 더구나 은행업은 정부가 면허장을 주는 특권 사업이다. 장사가 될 만하니 온 나라 은행장은 퇴직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는 웃기는 상황이다. 금융업 전부를 착취구조로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고리대금업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