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 소설가 >

요즘 종부세 때문에 여기저기 집 이야기가 한창이다. 아니,실제로는 집 이야기가 아니라 세금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는 해당되는 사람이나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답답하게 들린다. 집 이야기에 꿈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세상을 살며,나이가 많거나 적거나,자기 혼자만 추억하고 꿈꾸는 조금은 넉넉한 공간으로서의 집이 있다. 특히 어린 시절의 추억과 깊은 관련이 있을 때는 그 공간이 자기 혼자만의 공간인 듯하면서도 실은 부모와 함께 한 공간이고, 또 형제들과 함께 한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은 허물고 새집을 지었지만,우리 형제들이 여전히 '옛집'이라고 부르는 대관령 아래의 예전 집은 아주 오래 전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아버지가 그 집에서 태어났고,우리 5남매도 그 집에서 태어났고,또 큰 조카와 내 아들도 그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것만으로 따진다면 3대가 옛집 안방에서 출생을 한 셈이다.

'옛집'이라고 해서 아주 옛날 고가 형태의 집은 아니다. 80년 전쯤에 지어진 기와집이었는데,그 집이 우리 형제들에게는 지금도 모든 집의 기초가 되는 셈이다.

15년 전 아버지가 너무 오래되어 낡은 그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었다. 그때 우리 형제들에게 새로 지을 집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나는 집 방향이나 마당이 그대로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예전의 집 주변에 가득했던 나무들도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형제들이 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도 새 집을 지었을 때,그것이 꼭 남의 집 같은 느낌처럼 뭔가 불편한 것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옛집의 '서녘마루'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지으셨던 옛집은 여덟 칸짜리 기와집이었다. 마루는 처마를 따라 ㄱ자로 집의 반을 둘러싸듯 놓여 있었다. 남향으로 놓인 마당쪽의 앞마루는 그냥 '마루'라고 불렀고, 서쪽 마루는 툇마루라는 말 대신에 꼭 '서녘마루'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양옥으로 새로 지은 집은 굳이 집 밖으로 따로 마루를 둘 필요가 없었다. 옛집의 마루보다 더 넓은 거실이 실내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 옛집에서 자란 우리들에게는 마루가 없는 것이 마음 속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옛집에는 방안과 마당의 중간 공간으로 마루가 있었는데,그리고 으레 그 마루에서 놀곤 했는데 새 집을 지으며 그 중간 공간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어릴 때 저마다 방을 가지고 있었지만, 방에서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한 곳도, 형제들이 놀다가 서로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하고 다툰 곳도, 그리고 여름이면 또 저녁마다 자기 방에서 삼베 홑이불을 베개에 치렁치렁 감아 들고 나오던 곳도 바로 '서녘마루'였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국어책에 실려 있던 '큰바위 얼굴'을 읽었던 곳도 그 마루였으며,그걸 읽으면서 그래,이런 곳에 걸터앉아 큰바위 얼굴을 보고 그 바위로 마지막 햇살을 비추며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았을 거야 하고 생각했던 곳도 바로 그 마루에서였다.

그 마루에 앉아 솔잎 사이로 부는 바람을 보고, 솔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솔잎 사이로 밀려드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자랐는데, 어른이 되어 다시 지은 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지었는데도 마루가 사라지자 그 추억들도 함께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저마다 집에 대하여 또 하나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다음에 집을 지으면 그 집 바깥에 꼭 '서녘마루'를 만들 생각이다. 내가 이 얘기를 했더니 다른 형제들도 다 같은 뜻의 말을 했다. 그곳은 방안도 아니고 마당도 아닌,그 중간에 위치한 '서녘마루다. 도시의 베란다나 테라스와는 또 차원이 다르다. 그곳은 우리 추억의 창고였고,그 창고의 이름은 '서녘마루'였다.

다시 옛시절로 돌아가 솔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과 햇빛과 노을을 느끼며, 그런 자연이 우리에게 다시 옛시절의 추억을 말해주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집이 삶의 공간으로서 보다는 재산적 가치를 더 따지게 되면서 우리 삶은 오히려 더 팍팍해지고 만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