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1928∼1987)은 의지의 미국인이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생전에 미국 최고의 작가로 부와 명성을 누렸다. 그런 자신을 두고 그는'미운 오리새끼'라고 불렀다. 그러나 앤디 워홀이란'백조'는 동화에서처럼 시간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약속시간 엄수,시대와 대중의 의식을 읽는 탁월한 감각,성공에 대한 무서운 열망과 집착의 산물이었다. 공장(Factory)으로 이름붙인 자신의 작업실에 모여든 사람들이 파티를 벌일 때도 그는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며 일했고,유명인사라면 무조건 달려가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잡지 삽화가로 시작,구두 디자인과 광고로 돈을 벌었다. 상업미술로 이름을 얻었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팝아트라는,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사진과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해 사물을 반복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대량 생산 및 소비라는 산업사회와 매스미디어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미술의 개념 자체를 바꿔 버렸던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타가 되는 방법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천했다. 마릴린 먼로,존 F 케네디,마오쩌둥 같은 세계적 명사들의 초상화 제작에 몰두한 것도 어쩌면 대중의 눈길을 끌고 튀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는지 모른다.

'앤디 워홀 팩토리'(15일∼6월10일'삼성미술관 리움')는 그런 워홀의 삶과 예술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피츠버그 워홀미술관의 협조로 이뤄진 '20주기 기념전'으로 '캠벨수프''브릴로 상자''재키''꽃' 등 대표작과 상업디자이너 시절의 드로잉·사진 등 200여점이 망라됐다.

'20세기 예술계의 마술사'로 불리는 워홀은 어쩌면 개천의 용들이 흔히 지니는 성실함과 치사함을 함께 지닌 약점투성이 인간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성에 치열한 승부정신을 더했던 결과 팝아트라는 독창적 장르를 창조했다. 예약관람제가 폐지됐으니 언제든 작품과 더불어 국내 최고의 민간미술관을 둘러보시길.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