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법원이 '독점금지법'과 배치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대법원은 특히 오는 26일 '제조업체의 소매가격 결정금지' 조항 폐지에 대한 판결을 내릴 예정이어서 독점금지법 완화 여부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판결 내용에 따라선 제조업체의 상품 판매 방식과 도·소매 업체의 지각 변동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돼 주목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미 대법원이 100년 넘게 독과점 및 가격 담합을 금지해 온 독점금지법을 거스르는 친(親)기업적 판결을 최근 잇따라 내리고 있다고 19일 보도했다.

작년의 경우 대형 정유회사인 텍사코와 셸이 서부 지역에서 휘발유를 판매하기 위해 설립키로 한 합작회사가 독점금지법에 위배된다는 하급심 판결을 대법원이 뒤집어 버렸다.

"두 회사가 가격 담합의 가능성은 있지만 서부 지역에서 경쟁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합작회사 설립은 독점금지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게 대법원의 설명이었다.

이어 특허 기술을 가진 기업이 그 상품과 함께 다른 상품을 끼워 파는 것은 불법이라는 규정에 반대되는 판결을 내렸다.

"끼워팔기 제품을 사기 싫은 소비자는 다른 제품을 사면 된다"며 기업 영업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아울러 지난달에는 대형 벌목회사가 원자재회사를 사들여 경쟁 관계인 원자재회사를 공격하려 한 것이 독점금지법에 위배된다며 7900만달러의 벌금을 부과한 배심원의 판결을 깨고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이 이처럼 독점금지법을 완화해 해석하고 있는 것은 기술과 글로벌화의 진전으로 인해 기업 간 경쟁 환경이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체에 대한 규제를 최소화함으로써 다른 국가의 제조업체를 상대로 한 경쟁력을 기르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엔 물론 자유로운 기업활동 보장을 주창해 온 부시 행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도 작용하고 있다.

대법원이 이런 추세를 더욱 가속화할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판결이 오는 26일 나온다.

제품의 소비자가격 결정권을 누가 갖고 있는지 판결할 예정인 것.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핸드백과 보석류를 제조하는 '리긴 크리에이티브'란 회사는 소매상들에 자사가 정한 가격대로 물건을 팔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반한 업소에 물품 공급을 중단했다가 피소됐다.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패소한 뒤 대법원에 상고해 놓은 상태다.

미국에선 현재 소비자가격을 도매상이나 소매상들이 자유롭게 결정하고 있다.

물론 제조업체들이 권장 소비자가격을 설정하지만 말 그대로 '권장'에 불과하다.

구속력도 없고 지켜지지도 않는다.

리긴 크리에이티브처럼 이를 강요할 경우 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그러다 보니 제조업체가 대형 도·소매 업체들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제조업체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특수 인테리어를 설치한 소매업체에만 제품을 공급하지도 못한다.

부시 행정부와 전미제조업협회(NAM) 및 기타 경제 단체들은 제조업체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제조업체에 의한 소매가 결정 금지'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대법원이 오는 26일 어떤 판결을 내리느냐는 독점금지법 완화 추세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전망이다.

만일 제조업체의 가격 결정권을 받아들일 경우 제조업체와 도·소매업체 간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은 물론이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