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하순 뉴욕에 왔을 때다. 월셋집을 구하러 나섰지만 마땅치 않았다. 애를 태우는 기자에게 부동산 중개업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차라리 집을 사라"는 권유였다. "돈이 어디 있냐"고 의아해 하자 아주 진지한 답변이 돌아왔다. "자기 돈 한푼 없이도 얼마든지 집을 살 수 있다"고. "집값의 100%까지 빌려 주는 모기지 회사가 널려 있으니 결심만 하면 된다"는 게 중개업자의 설명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작년 여름. 동네에 'For Sale(집 팝니다)'이란 안내판이 하나 둘 내걸렸다. 하루가 멀다고 안내판은 늘어났고 숫자는 지금도 증가 추세다. 1년 넘게 안내판을 떼지 못하는 집도 부지기수다. 요즘 들어선 '경매'란 안내판도 새로 걸리고 있다.

지난주 세계증시를 뒤흔들었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파문의 현장은 이렇다. 집값이 오를 것으로 믿고 대출을 받아 집을 샀는데 집값은 내리고 금리는 오르니 '항복선언'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2004년 9월 집을 산 교포 이모씨(47)도 그런 경우다. 이씨는 65만달러짜리 집을 사면서 90%를 빌렸다. 신용이 좋지 않아 서브프라임 금리가 적용됐다. 당시 금리는 연 9.4%. 그러나 첫 2년간은 2.5% 이자만 내면 된다는 조건에 귀가 솔깃했다. 2년 후 낮은 금리의 대출로 갈아타거나 집값이 오른 뒤 팔면 되려니 했다. 웬걸. 작년 9월부터 이자는 11%로 뛰었고 집도 팔리지 않았다. 이씨는 손을 들었고 지금 그의 집은 은행으로 넘어갔다.

이렇듯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파문은 집값 상승에 현혹된 대출자와 이들 심리를 미끼로 무분별하게 대출을 늘린 모기지 회사의 합작품이다. 돈이 된다는 생각에 앞뒤 없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사들인 대형 투자은행과 이들이 발행한 주택저당채권(MBS)을 매입한 투자자들도 '미필적 고의범'쯤은 된다. 이들의 실수는 한 가지로 모아진다. 다름 아닌 시장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는 시장의 원리를 도외시한 채 마냥 오르막만 있을 것이란 환상이 초래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런 현상은 국내에서도 많이 본 듯한 느낌이다. 좀 멀리는 1990년대 말 원금이 보존된다며 신탁상품을 팔았다가 큰코다친 은행들이 그렇다.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남발했다가 제 발등을 찍은 카드회사들도 마찬가지다. 가까이는 돈이 된다고 주택담보대출에 경쟁적으로 나섰다가 지금 가슴을 졸이고 있는 은행들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사건'들과 서브프라임 파문의 차이점 중 하나는 정책당국의 대응인 것 같다. 대출자들이 아우성치고,증시가 무너진다고 요란해도 정책당국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금리정책도,유동성 지원도,부동산 대책도 없다. '대출자도,모기지 회사도 행동에 맞는 책임을 지라'는 투다. 'XX대책'과 'OO지침'이 쏟아졌던 한국과는 판이하다.

경제규모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미 정책당국의 대응은 어디까지나 시장에서 파생된 것은 시장참가자들이 책임을 지고 시장에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모아진다. 서브프라임 파문에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것은 시장을 무서워할 줄 알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라면 서브프라임 파문을 지나치게 축소 해석하는 것일까.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