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가까운 댁에서 아들을 장가 보낸다기에 축하하러 갔다가 갑작스레 축의금 접수를 맡게 됐다.

축의금 접수는 보통 가족이나 친구의 몫.그날도 신랑 친구 두 사람이 하고 있었다.

신랑은 국내 유수 의과대학을 나온 공중보건의.접수를 담당한 친구들은 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일의 발단은 간단했다.

축의금 봉투를 내밀고 돌아서려는 순간 잘생긴 청년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하지만 이게 무슨 자(字)인가요?" 한 사람은 봉투에 번호를 매긴 뒤 장부에 이름을 적고,한 사람은 그 봉투를 받아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둘 다 봉투에 적힌 한자(漢字) 이름을 읽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하객은 밀려드는 데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보다 못해 옆에 앉아 한자를 읽어줬다.

여기저기서 의아한 듯 흘끔거렸지만그렇다고 도중에 일어설 수도 없었다.

더러는 방명록이 있으니 번호만 적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방명록과 봉투의 번호가 일치하지 않는데다 봉투만 내놓고 가버리는 사람도 많으니 제대로 적지 못하면 자칫 누가 다녀갔는지도 모를 참이었다.

이름에 쓰이는 한자 중엔 더러 읽기 힘든 것들이 있지만 그들은 쉬운 글자도 거의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 우수생들이 들어간다는 의과대학 졸업생들의 실상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대학 새내기 80%가 부모의 한자이름을 못쓰고,20%는 자기 이름도 못쓴다는 마당이니 이들을 탓할 순 없다.

게다가 이들은 이과생(理科生)이 아니던가.

한글 전용 교육에 따른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생겨난 건 어제 오늘이 아니다.

지금은 감독으로 활약 중인 야구스타 김재박(金在博)씨가 골든글러브상 유격수 부문 수상자로 뽑히던 날 호명에 나선 연예인이 단상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김∼재∼전' 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日刊(일간)'자가 붙은 신문 제호를 한글화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실시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전체 제호를 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간'만 떼어내 읽게 했더니 절반이 읽고,다시'일'자와'간'자를 구분해 '간'자만 보여줬더니 10%도 못 읽더라는 통계를 내밀었다는 것이다.

'한글 전용시대에 한자로 쓰는 사람이 문제'라거나 '과도기여서 그렇다.

언젠가 모두 한글만 쓰게 되면 곤란할 게 없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특별한 경우 외엔 이름에 한자가 붙지 않게 될 확률은 극히 적어 보인다.

유명인사들이 툭하면 내놓는 사자성어가 없어질 것 같지도 않다.

기업이나 관공서 서류의 한자(한자말) 역시 가까운 시일 안에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상당수 기업에서 입사시험 과목에 한자를 포함시키거나 한자 능력 자격증 소지자에게 가산점을 주겠다고 나서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가꿔나가는 일의 중요성이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모의 한자 이름은 물론 제 이름조차 제대로 쓸 수 없게 만드는 교육은 곤란하다.

축의금 봉투의 이름이야 그렇다 치고 환자의 한자 이름도 못읽는다면? 뒤늦게 한자 강좌를 개설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지만 의과대학에서 그런 일이 생겨날지는 의문이고,일상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대학에 가서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터무니 없다.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의무교육 기간 동안 가르치는 게 좋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