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 < 시인 >

마흔 살의 한 주부는 1960년대 끝의 어느 날 신문에서 작고(作故)한 한 화가의 회고전 기사를 읽는다. 그가 스무 살 때 6·25를 만나서 대학을 중퇴하고 미군부대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맡은 일이 미군 병사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과 병사들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만났던 무명(無名)의 화가가 세상을 뜬 뒤 여는 회고전이었기에 그는 전시장으로 달려갔고 그림에 붙여진 값이 다락같이 높은 것에 놀라야만 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살림만 하던 손에 펜을 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목'은 여성동아에서 공모한 장편소설에 당선돼 그는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마흔 살에 등단한 소설가는 박완서씨이고 생전에 빛을 못 보았던,그러나 한 작가를 탄생시킨 모티브를 준 화가는 박수근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지만 나는 박완서씨에게서 직접 들었다. 새삼 한 작가와 한 화가의 일화(逸話)가 떠오르는 것은 요즘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박수근,이중섭의 그림이 10억원대를 넘나드는 높은 값에 팔려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전에는 물감과 캔버스를 살 돈도 없었던 화가들의 작품이 죽은 뒤에라도 미술사에 높이 평가되고 그림이 제 값을 받고 있음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 문화대국을 자랑하는 프랑스에서도 고흐가 생전에 돈을 받아보았다는 그림은 오직 한 점. 그의 주치의였던 가세 박사의 초상이었다는데 지금 경매에 나오면 1000억원쯤 받을 거라고 한다. 그러니 지난 한 시대 강점기와 전쟁을 겪은 우리로서는 어쩌면 별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이름 있는 화가의 손바닥만한 그림이 몇 천만원을 호가하는 현상은 미술계를 위해서 크게 반길 일이나 글동네를 기웃거리는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제 값을 못 받는 글값에 속이 터진다. 생전에 내 방 한 칸을 못 가졌던 문인들이 훗날 소설이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자손들이 많은 인세(印稅)를 받게 되었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그림은 엽서 크기의 호당 값을 몇 백만원,몇 천만원씩도 부르는데 시나 소설은 쓴 사람이 값을 부르지 못하고 잡지사나 출판사가 값을 매겨준다. 문학잡지의 경우 열이면 아홉은 원고료를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제대로 주는 경우도 산문은 원고지 한 장에 1만원 안팎이고 시는 10만원 받기가 어렵다.

누구는 반문할 것이다. 왜 밀리언셀러로 돈 버는 작가도 있지 않느냐고. 물론 그런 신기루(蜃氣樓)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를 내고도 문 닫는 출판사가 많고 작가 또한 같은 처지가 되는 일도 자주 보는 것이 오늘의 문단 현실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는 아파트나 부동산 값은 그만 두고라도 지금 받는 원고료가 30년 전과 같은 것이라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억대에 가까운 연봉도 적다고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는 근로자들도 있는데 이 나라의 문인들은 글값을 아예 한 푼도 못 받거나 고작 많이 받는다 해도 강남 아파트 한 채 장만하려면 산문은 10만장쯤 써야 하고 시는 1만편 이상 지어야 하는데도 어디다 대고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

정치 한다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하고 문화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고 말은 늘어 놓지만 정작 문화예술의 뿌리이고 둥치가 되는 문학이 보릿고개를 못 넘고 있는 것에는 고개를 돌리고 있다.

'왜 한국문학은 노벨상을 못 받는가? 왜 우리의 소설이나 시가 세계로 뻗어 나가지 못하는가?'를 묻기 전에 먼저 이 땅의 토양에 문학과 예술을 키워낼 만한 거름을 주고 있는가를 돌아볼 일이다.

그림 값이 올라가고 한류(韓流)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고 있는 것만을 기뻐할 때가 아니다. 문화는 지금 심는 나무가 백년 뒤에 열매를 다는 것. 글값도 제대로 못 주는 나라가 언제 문화 강국의 문패를 달 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