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업계의 포식자 '미탈'] 세계의 '鐵' 다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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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락시미 미탈이 카리브해의 작은 철강회사를 인수하며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할 때만 해도 업계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작년 세계 2위 철강회사인 아르셀로를 인수하며 그는 철강업계의 '제왕'으로 우뚝 섰다.
미탈은 단 한번도 제철소를 직접 지어본 적이 없지만 인수·합병(M&A)만으로 16년 만에 회사 규모를 138배나 키웠다.
그는 포스코 인수설과 관련,24일 "전혀 모르는 얘기다.
전적으로 루머일 뿐이다"고 밝혔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성격을 감안할 때 포스코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게 업계의 우려다.
세계 최대의 철강 제국을 만든 미탈의 실체를 분석해본다.
◆인도의 황무지에서 출생
미탈은 사막처럼 척박한 땅인 인도 라자스탄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1960년대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미탈의 할아버지는 공장 근로자였다.
미탈은 어릴 적 콘크리트 바닥에서 생활하며 로프로 만든 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 모한 미탈은 콜카타로 이주한 후 작은 철강회사를 세워 기반을 마련했다.
덕분에 명문 자비에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학교 친구들은 미탈이 숫자에 매우 밝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아버지가 만든 철강회사 이스팟(Ispat,강철을 뜻하는 힌두어)에서 일을 도왔던 그는 자연스럽게 졸업 후에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
미탈의 운명을 바꾼 건 뜻밖의 사건이다.
당시 인도 정부는 국영 및 민영회사 각각 한 곳에 사실상 철강산업에 대한 독점권을 줬다.
미탈의 아버지는 이런 규제 탓에 인도에서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부도가 난 인도네시아 철강 회사를 인수했다.
미탈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부실 회사를 구조조정하는 일을 해본다.
그는 이민자 등을 활용해 원가를 낮추면서 실적을 높였다.
미탈의 세계 진출 기회도 우연히 찾아왔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정부가 가동률이 30%에 불과하고 하루 100만달러씩 적자를 내던 이스콧을 팔기로 결정한 것이다.
적자 공장이라 값도 쌌지만 미탈은 이스콧 인근에 항구가 있어 수출이 쉽고 천연가스를 싼 값에 쓸 수 있는 데다 종업원도 우수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1989년 4월 이스콧을 사들여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고장난 설비를 수리하고 직원을 교육했으며 인도와 일본의 철강 전문가를 파견해 생산 공정 전반을 혁신했다.
성과는 놀라웠다.
1년 만에 생산량이 배로 늘어났고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공격적 M&A로 몸집 불려
이스콧 인수 성공 이후 미탈은 세계시장 진출을 열망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인도나 인근 지역에서 사업을 하기를 원했다.
가족과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미탈은 결별을 택했다.
미탈은 아버지 회사 이스팟의 해외사업부를 물려받아 회장으로 취임했다.
인도 사업부는 그의 다른 형제가 물려받았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된 미탈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이스콧 모델이 성공을 보장해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
부실 기업 인수의 가장 큰 장점은 값이 싸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력 감축,생산효율화 등 구조조정을 통해 턴어라운드(정상화)에 성공하면 기업 가치는 엄청나게 높아질 수 있다.
또 개발도상국 제철소를 인수하면 국제기구의 차관 등 자금 지원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먹잇감을 노리던 미탈은 멕시코 회사 등을 인수한 데 이어 1995년 카자흐스탄 카르멧의 부실 철강 회사를 사들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미탈의 카자흐스탄 기업 인수가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카자흐스탄의 철강 수요가 많지 않은 데다 국영기업 체질을 벗지 못한 근로자들은 품질이나 효율성 향상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탈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기 좋게 입증했다.
카자흐스탄 자체의 철강 수요는 많지 않았지만 이 공장은 중국과 접해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실제 공장 구조조정에 성공할 즈음 중국의 경제 개발이 가속화하면서 철강 수요가 급증했다.
결국 인수 1년 만에 9000만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는데 이는 카자흐스탄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9%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대박이 이어지면서 미탈의 성공 방정식은 '기업 인수 후 턴어라운드'로 굳어졌다.
다른 사람에게는 '쓰레기'였던 철강회사가 미탈에게는 '보물'이었던 셈이다.
덩치가 커지면서 선진국 회사도 그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다.
미국과 캐나다 남아공 독일 업체에 이어 룩셈부르크의 아르셀로까지 인수하면서 '아르셀로 미탈'은 부동의 1위 철강 업체가 됐다.
이런 성공에는 파르타(Partha)로 불리는 고대 인도의 재무관리 방식도 한몫했다.
미탈은 파르타 방식에 따라 매일 저녁 일과 후 관리자들과 함께 미리 정해진 원가 및 매출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를 점검하는 회의를 갖고 효율성 극대화를 추구했다.
또 모든 구매 주문을 유럽 본사가 취합해 한꺼번에 대량 주문을 내서 원재료 구입 비용을 낮췄다.
미탈은 제철소 턴어라운드의 세계 최고 전문가지만 2년 안에 생산성 개선이 이뤄지지 않거나 노조가 지나치게 많은 요구를 할 경우 과감하게 공장 문을 닫기도 했다.
아일랜드 제철소가 대표적인 사례다.
◆화끈한 씀씀이와 불도저 성격
미탈은 한번 인수 타깃을 정하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해야 직성이 풀린다.
일례로 미탈이 카자흐스탄 철강 공장을 인수할 때 1억달러의 자금이 계약을 알선한 업체에 커미션으로 건네졌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물론 회사 측은 철광석과 에너지 공급 대가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알선 업체가 여러 비리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의혹이 증폭됐다.
또 미탈이 루마니아의 최대 철강회사인 시덱스(SIDEX)를 인수할 때에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루마니아 총리에게 미탈에 협조해달라는 서한을 보내 구설에 올랐다.
미탈이 블레어가 속한 노동당에 거액을 기부했기 때문에 영국 언론이 유착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미탈은 '콜카타의 철강왕'으로 불리지만 그의 사생활은 자선활동에 엄청난 돈을 썼던 '원조 철강왕' 카네기와는 딴판이다.
그는 '영국의 타지마할'로 불리는 켄싱턴 저택을 1억2000만달러에 사들였다.
차량 20대의 주차가 가능하고 대형 수영장과 연회장 등을 갖춘 이 초호화 저택은 로이터 창업자인 폴 로이터가 살았던 곳으로 영국에서 왕궁을 제외한 민간 주택 가운데 가장 비싸다.
또 1998년 미탈의 장남인 아디트야의 결혼식을 무려 나흘간이나 콜카타에서 진행했다.
초호화 결혼식으로 인도 좌파 인사들이 시위까지 벌였다.
하지만 미탈은 이에 굴하지 않고 딸 배니샤의 결혼식을 더 화려하게 치렀다.
이 결혼식에 총 6000만달러를 쓴 것으로 전해졌는데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통째로 빌려 1500명의 하객과 함께 최고급 파티를 열었다.
미탈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류애를 생각하기엔 아직 나이가 젊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남국 기자 n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