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창설 50주년-고민하는 서유럽] "기업의 東進을 막아라"
'race-to-the-bottom(바닥을 향한 경쟁).'

올해로 유럽연합(EU) 출범 50주년을 맞은 서유럽 경제인들은 2004년 동유럽의 EU 진입 이후 거세지는 변혁의 물결을 이렇게 표현한다.

회원국 정부들이 기업들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해 행정 규제 축소,법인세 인하,근로조건 현실화 등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면서 특히 노동시장은 이른바 '유연성 빅뱅'에 직면해 있다는 뜻이다.

최근 유럽 최대 자동차 그룹인 폭스바겐이 독일과 벨기에에서 '보상 없는 근로시간 연장'을 잇따라 밀어붙여 성취해낸 게 대표적인 예다.

제조업의 경우 인건비가 비싼 서유럽에서는 이제 일자리 보장을 담보로 한 임금 동결은 기본이며,근로시간 연장도 일반화하는 추세다.

나아가 근로시간의 노동생산성 연계까지 추진하고 있다(EU의 리스본 아젠다).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보상 없는 추가 근로를 감수해야 한다는 게 그 취지다.

동유럽의 경영 환경을 감안할 때 서유럽 기업들이 '엑소더스'를 꿈꾸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동유럽 최대 국가인 폴란드의 경우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은 2500즈워티(약 75만원).서유럽은 물론 한국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다 일정기간 법인세 면제 등 각종 인센티브를 덤으로 제공한다.

동유럽 경제인들은 1990년대의 중국을 연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동유럽은 자동차산업의 새로운 메카로 발돋움 중이다.

삼성전자 영국 공장은 헝가리로,LG도 폴란드에 거대한 전자단지를 세우는 등 국내 기업들의 동진도 한창이다.

브라이언 맥도널드 주한 EU대표부 대사는 서유럽에서 빠져 나오는 외국인 직접투자(FDI)의 80%가 동유럽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노동 단체를 중심으로 한 서구 일각에서는 사회 보장과 실질 임금의 희생을 통한 기업 유치나 수출 확대를 일종의 소셜 덤핑(social dumping)이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서유럽 정부와 대다수 근로자들은 바닥을 향한 이 같은 경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조병휘 KOTRA 브뤼셀 관장은 최근 유럽 정부들이 '플렉시큐리티(flexibility+security)'를 화두로 떠올린 것도 일종의 고육책이라고 지적했다.

"기업 엑소더스를 막기 위한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가 불가피한 지금 정부는 기업 규제 정책을 버리고 새로운 일자리 마련과 근로자 재교육 등 사회 안전망 강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것이다.

통합의 골격을 제시한 첫 헌법 격인 로마 조약이 체결된 지 25일로 50주년.6개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라는 이름으로 출범시킨 유럽 합중국 건설의 꿈은 EU 발족과 함께 회원국 수를 27개로 불리면서 국경 개념이 없어지고 '유로'라는 단일 화폐를 통용시키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역내 회원국 간 무제한 경쟁을 부추겨 유럽 대륙은 규제의 사슬을 끊고 '기업 천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브뤼셀·암스테르담=김영규 기자 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