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개월간 진행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출범부터 타결까지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 백미는 최종 통상장관 협상의 마지막 4박5일이었다.

양국 대표단은 협상 기한의 연장을 거듭하며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진검승부를 벌였다.

우리 측 일부 분과는 사실상 우리 측의 최종 양보안을 일찌감치 미국 측에 던져놓고 미국 측의 선택을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일부 분과는 막판까지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고비의 순간들을 되짚어 본다.

◆연장…또…연장

미국이 협상 시한을 전략으로 활용하면서 숱한 고비를 맞았다.

당초 데드라인이었던 3월31일 오전 7시를 16시간 이상 남겨둔 30일 오후 "미국이 협상 시한을 4월2일까지 연장할 것을 제안했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협상장 주변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청와대와 미 무역대표부가 이를 공식 부인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지만 협상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서 결국 데드라인을 넘기고 말았다.

결국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가 31일 아침 "협상시한을 48시간 연장한다"고 발표하면서 미 행정부와 의회가 협의해 정한 4월2일 오전 1시(미국시간 4월1일 낮 12시)가 새로운 데드라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2차 데드라인이 임박할 때까지 회담은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마감 시한은 또 한 차례 연장됐다.

결국 협상이 타결된 시점은 2일 오후 1시께로 미국시간으로 1일 밤 12시.미 의회가 정한 무역촉진권(TPA)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마지노선에 가까스로 턱걸이 한 셈이다.

◆농업분야 초강수 카드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이 미국 측 협상단에 우리측 농산물 분야 최종 양허안 카드를 던진 시점은 31일 오전 4시30분께.배 국장은 이것이 우리 측의 막판 카드라는 입장과 함께 이제 "그냥 자자"고 말했다.

배 국장의 전격 공세에 미국 측 협상단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결과적으로 이번 협상의 최대 쟁점이었던 농업분야의 공은 미국으로 넘어갔고 이후 농업협상은 1일 오전 9시를 넘겨 29시간 만에 재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측 농업협상의 전권을 가진 리처드 크라우더 미 무역대표부(USTR) 농업협상대사가 1일 오후 5시35분 돌연 협상장을 나와 출국해 버리자 회담장 주변은 결렬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과 함께 아연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반전은 협상 시한인 2일 오전 8시에 벌어졌다.

민동석 농림부 차관보가 "미국이 더 이상 쇠고기 위생·검역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얻기 위한 별도의 합의도 없었다"며 합의가 이뤄졌음을 사실상 확인한 것이다.

◆두 차례의 청와대 보고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하기 위해 협상장을 떠나 청와대로 들어온 것은 협상기간 중 두 차례다.

지난달 29일 노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고 서울 공항을 통해 귀국하자마자 권오규 경제부총리와 함께 청와대에서 협상 경과를 보고했고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몇 가지 협상 지침을 내렸다.

두 번째 청와대 방문 시점은 협상 시한이 48시간 연장되고도 별다른 진전 없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1일 저녁 8시.협상장 주변에서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가 흘러나왔다.

김 본부장이 협상장으로 돌아온 10시30분께 때마침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도 본국의 훈령을 들고 협상장에 나타났다.

곧이어 양국 통상장관이 '타결이냐 결렬이냐'를 결정할 최종 담판에 돌입했다는 소식과 함께 회담이 결국 타결로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2일 오전에도 "협상 중"

하지만 2차 데드라인으로 설정한 2일 새벽 1시가 넘도록 협상장 주변에 어떠한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한동만 외교통상부 통상홍보기획관이 기자실을 찾아 "협상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며 "일단 1시에는 협상 결과 발표는 없다"고 짧게 말한 것이 전부였다.

오전 1시40분 통상장관들이 다시 회담에 들어갔다.

협상장 주변에선 최종 시한은 오후 1시라는 해석이 나왔다.

미국 시간으로 1일 밤 12시까지만 타결시키면 TPA의 적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협상장 주변은 밤새 별다른 특징 없이 조용히 지나갔지만 이 시간 양측 협상단은 농업과 자동차 등 핵심 분야에서 합의를 이뤘다.

하지만 오전 9시를 넘겨도 협상은 끝나지 않았다.

금융협상을 맡고 있는 신제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심의관은 "언론이 너무 타결 임박을 강조하면 우리 측 협상단에 압력이 되며 결국 오래 버틴 쪽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협상장으로 올라갔다.

아직 마지막 끝내기가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백악관도 노심초사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도 마지막날 협상이 진행된 1일(현지시간) 미 무역대표부(USTR)와 백악관,의회 측 관계자들이 비상 대기하며 서울의 협상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요일인 이날 이미 부활절 연휴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USTR 관계자들은 온종일 사무실에 대기하며 서울에서의 타결 소식을 고대했다.

협상 막판인 지난 30일 "협상이 잘 안되고 있다.

이대로는 합의가 안 될 것 같다"며 공개적인 압박을 가했던 백악관 측도 이날은 일체의 코멘트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갑자기 움직인 김현종…타결선언

2일 오전 내내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협상장에는 오전 11시35분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김종훈 수석대표가 승용차에 오르는 움직임이 목격되면서 협상 타결이 임박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돌았다.

두 사람이 이 시간에,그것도 서류뭉치를 들고 갈 만한 곳은 청와대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에게 타결을 보고한 사람은 권오규 경제부총리.총리 직무대행 자격으로 노 대통령과 오찬 주례회동을 가진 권 부총리는 낮 12시40분께 최종 타결 사실을 알렸다.

오후 1시께 다시 협상장인 하얏트호텔에 도착한 김 본부장은 기자들에게 타결 사실을 웃음으로 확인해줬다.

14개월의 대장정을 마감함과 동시에 비준과 이후 비준 동의를 향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심기/김현석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