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3일 기자시사회를 통해 공개됐다.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거장의 기념비적인 작업이어서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작품.

1993년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시대를 열었던 '서편제'의 오정해가 주인공으로 재발탁됐고,드라마 '피아노'의 조재현이 아무역이나 맡겠다고 자청해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이날 모습을 드러낸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을 연상시켰다.

'서편제' 주인공들의 성년기 사랑이 한국 전통문화와 소리,자연풍광과 어우러져 표현됐기 때문이다.

임 감독은 "'서편제'를 훌쩍 벗어난 평가가 나오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천년학'은 성공을 거뒀다.

한국인의 정(情)과 한(恨)을 거장의 그윽한 시선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까닭이다.

게다가 사랑이란 보편적인 테마로 공감대는 더욱 확대됐다.

'서편제'에서는 최상의 소리를 얻기 위한 희생으로 한이 생겨났지만 여기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한이 생겼다.

'천년학'은 소설가 이청준씨의 남도소리 연작 '선학동 나그네'의 골격 위에 '서편제'의 송화(오정해)와 동호(조재현)를 주인공으로 끌어 들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리꾼 양아버지 아래서 의붓 남매로 자란 동호와 송화는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동호는 마음 속의 연인을 누나라 불러야 하는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집을 떠난다.

몇년 후,양아버지가 죽고 송화는 눈이 먼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 동호는 송화를 누나가 아닌 여자로서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찾아 나선다.

영화는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동호의 회상으로 전개한다.

회고식 구성은 자신의 뜻과 어긋난 길로 접어든 운명에서 비롯된 한(恨)을 부각시키는데 적절하다.

주요 인물들은 모두 한을 품고 산다.

두 주인공뿐 아니라 동호를 사랑하는 유랑극단 여배우 단심과 송화를 사랑하는 선술집 주인 용택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다.

이들의 인연은 모두 소리로 맺어진다.

소리는 이들이 삶의 고비에서 정한을 표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 배경의 수려한 풍광이 한의 여운을 더욱 처연하게 드러내준다.

해안 절경을 끼고 걷는 송화와 동호,제주도 오름에서 부르는 창,매화가 만발한 광양에서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진도 민요 등은 생의 허무와 비애를 짙게 드리운다.

삶의 비극성을 강화하기 위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배치하는 방식은 임 감독 특유의 작풍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가슴에 작은 멍울이 만져지는 듯하다.

14일 개봉,12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