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많은 제자를 둔 사람은 누굴까.
정답은 국내 최대 교육기업인 대교그룹의 강영중 회장(58)이다.
2007년 현재 대교의 학습지 회원 수는 230만명.지난 30여년간 대교를 거쳐간 회원들을 모두 합치면 1000만명이 넘는다.
한국인 5명 중 1명이 강 회장의 '제자'인 셈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생계 때문에 시작한 과외방을 연 매출 8350억원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시킨 자수성가형 최고경영자(CEO)다.
동시에 한국배드민턴협회와 세계배드민턴연맹(BWF) 회장을 겸하고 있는 스포츠계의 거물이기도 하다.
지난달 20일 밤 서울 중림동에 있는 한 고깃집에서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기자들은 어렵사리 시간을 낸 강 회장과 만났다.
옆집 아저씨와 같은 소탈한 인상.진한 경상도 사투리.깔끔한 CEO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하지만 술잔을 부딪치며 털어놓는 강 회장의 '인생 역정'을 듣다 보니 '이 사람이 교육계와 스포츠계를 어떻게 주무를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이 보이는 듯했다.
4시간여에 걸친 강 회장과의 '노변 정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생의 대선배님께 세상 사는 얘기 좀 듣고 싶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대선배는 무슨… 술이나 한잔씩들 받아요.(기자들에게 일일이 술잔을 채워준 다음 자신 앞에 놓인 맥주잔에 얼음을 가득 넣고 소주를 따른다) 요즘 도수 낮은 소주가 유행인데 사실은 내가 원조입니다."
-술을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소주를 좋아해서 많이 먹었지요. 1988년 노사분규가 해결된 후 단합대회를 갔을 때는 하루 저녁에 28병을 마신 적도 있으니까. 지금은 나이가 들어 조금씩만 마셔요. 5년 전부터 와인에도 재미를 붙였고.배드민턴협회 일 때문에 자주 해외 출장을 가는데 와인을 모르면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 친구들은 저녁 식사시간이 보통 4시간 반인데 그 중 2시간이 와인 얘깁니다. 좋든 싫든 국제화가 빨라지는 상황이니 CEO들은 와인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일단 와인은 원샷하면 안 되죠.싱가포르에서 한 병에 500만원짜리 와인을 '원샷'하자고 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어요. (웃음)."
-주로 어떤 와인을 드세요.
"칠레 와인이 참 좋습니다. 괜히 비싼 유럽 와인 먹느니 칠레나 뉴질랜드 호주 와인을 먹는 것이 나아요. 제 입맛에는 '알마비바'라는 칠레 와인이 맞는 것 같더라고요. 알마비바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백작 이름이에요. 여러 품종의 포도로 만든 와인을 블랜딩해서 상당히 부드럽고 풍부하고 깊은 맛이 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두 병 가져올 걸 그랬네.와인은 비싼 것 먹을 필요가 없어요. 맛을 느끼고 음미할 수 있을 정도면 돼요. 한국은 와인 값의 거품이 좀 꺼져야 하는데.일본만 하더라도 와인이 한국처럼 비싸지 않거든요."
-와인 말고도 CEO 하려면 배울 게 참 많잖아요.
"음악은 젬병인데.요즘 오페라라든지 뮤지컬을 즐기는 법을 배워요. 필요하더라고요. 대학 때까지는 참 공부 안 했어요. 사회 나오니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동기 유발이 확실히 되더라고요. 경영자 자리에서 자질을 안 갖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그러다 보니 최고경영자 과정,노사과정,언론과정 등에 열심히 따라다녔어요. 수료한 과정이 11개나 되네요."
-30년 넘게 교육사업을 해 오셨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은 여전하지요.
"부모들의 생각은 똑 같아요. 못 먹고 못 살아도 아이들 공부는 시켜야 된다는 거.다 그런 어머니들이 계셨으니 그래도 한국이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이지요."
-달라진 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지요. 예전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선생님이면 무조건 존경했습니다. 요즘에는 선생님을 직업인으로 간주해 '내가 돈을 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교육 효과는 더 떨어지는데."
-그런 학부모들을 만족시키려면 학습지 교사 교육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겠네요.
"교사들이 학습지 회원을 관리할 때 회원 한 사람이 들어오고 한 사람이 빠져 나가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고 보잖아요. 저는 안 그렇습니다. 회원 한 명을 모집하면 교사에게 1점을 주고 반대로 회원이 탈퇴하면 3점을 깎습니다. 교사의 학생관리 능력을 중점적으로 챙긴다는 뜻이죠.학습지 교사에 대한 교육은 지식 전수보다 행동이나 인성 등에 더 중점을 둬요.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데는 교사가 필요없어요. 인터넷만 뒤지면 다 나오는 시대인데요. 얻은 지식으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 어떤 생각을 갖게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죠.생각이나 가치관에 대한 교육이 잘 이뤄지고 못 이뤄지고는 교사의 인성이나 가치관에서 결판이 난다고 봐요."
-그런 부분은 공교육에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요.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원어로 본 적이 있는데 말은 못 알아들어요. 하지만 감정은 전달이 되더라고요. 집에 돌아와 관련 자료,사진을 뒤져본 후 뮤지컬을 떠올리니까 뮤지컬 전체에 대한 이해가 금세 이뤄졌지요. 특히 공교육이 이렇게 돼야 하는데.우리나라 음악 수업은 어떻게 합니까. 학교에서 풍금을 운반해서 갖다 놓고 노래 몇 곡 부르고 나면 음악 시간 끝,음악에 대해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학교 교육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예요. 가정교육 또래교육 사교육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지식을 체험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창업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1975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5살 때 먹고 살려고 시작한 게 교육사업입니다.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겠고.뭔가 해야 했던 시기니까. 교육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시작은 원생 3명의 과외방이었어요."
-다른 사업도 많은데 왜 하필 교육사업을 했나요.
"'어른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그때 작은아버지 말을 듣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영재교육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시기에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죠.그때 '생각해 볼게요'로 끝났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웃음)."
-처음에는 일본에서 교재를 들여오지 않았나요.
"1976년 한국공문수학연구회를 만든 것이 사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의 구몬수학 교재를 한국식으로 가공해 학생들에게 그룹 과외수업을 했어요. 사실상 학원업이지만 등록은 출판업으로 했어요. 언젠가 교재를 만들어 팔아야겠다는 생각에 사업 등록을 출판업으로 했는데 만약 학원업으로 등록했으면 학원 외의 사업 아이템은 못 찾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학습지 형태 사업을 시작하신 것은 언제인가요.
"화(禍)가 닥칠 때 이를 잘 이용하면 기회가 오게 마련입니다. 1980년 과외금지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어떻게 하나 고민 참 많이 했어요. 과외방을 문닫고 3개월 정도 고민하니까 답이 나오더라고요.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면 안 되나'라고 역발상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교사가 가정을 방문해 학생을 지도하는 학습지 사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방문학습이라는 게 없었나요.
"원조인 셈이죠.그런데 남들은 로열티도 지불 안하고 다 써먹더라고요. (웃음). 처음에는 고생했어요. 일주일을 꼬박 돌아야 열 집(회원)이 안 되는 거예요. 회원당 5000원씩 받아 봐야 5만원인데 인건비가 안 나와요. 1985년 일본 교육업체 구몬으로부터 수학 교재의 판권을 로열티 지불 없이 받아내면서 사업이 점차 안정됐죠.하지만 장사가 잘 되니까 구몬 측이 마음을 바꾸더라고요. 다른 교재의 판권을 달라는 요구도 들어주지 않고 수학교재에 대한 로열티도 무리하게 요구했어요. 고민하다 구몬과의 인연을 끊었어요. 그동안의 노하우면 자체적인 브랜드로 승부해도 되겠다 싶었던 것이죠.1990년 그렇게 탄생한 것이 '눈높이'예요."
-10년 브랜드 '공문'을 포기하고 새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요.
"회사 임원들이 전부 뜯어말렸어요.하지만 지나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독자노선을 걷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230만 회원을 두고 있는 교육기업 대교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있는 젊은 기자 중에도 대교의 학습지로 공부한 친구가 많아요.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없나요.
"IOC 행사 때문에 해외출장을 가면 현지 교포 학생들 중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요.그럴 때 기분 좋죠."
-서울 뉴타운지역에 자립형 사립고를 세우는 계획은 어떻게 돼 가나요.
"교육부도 그렇고 서울시도 그렇고 다들 생각이 다르니 쉽지 않네요.제한이 좀 더 많아지면 못 할지도 모르겠어요. 공교육에서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개개인들의 능력과 자아를 일깨워 줄 수 있는 교육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사교육 업체여서 정부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닐까요.
"공교육과 사교육은 서로 보완관계인데 공교육 쪽에 있는 사람들은 사교육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개인의 적성이나 소질이 다 다르잖아요. 이런 부분들은 사교육,즉 사회교육에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공교육은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을 갖추고 교양을 닦는 부분을 담당하는 곳이고 사교육은 이를 보완하는 쪽이라고 봐요."
-체육인 입장에서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요즘 학생들 체육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자꾸 파고들어요. 골방에 틀어박혀 인터넷만 해요.이런 애들을 바깥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게 스포츠거든요그래서 IOC도 18세 미만의 학생만 참가하는 유스올림픽 개최를 검토 중입니다.유스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 꼭 한국에 유치하고 싶습니다.한국인은 스포츠 행사에 열광하니까 효과만점일 겁니다."
-한국배드민턴협회를 맡은 것과 동시에 아시아연맹 회장이 됐고 또 2년 만에 세계연맹 회장이 됐는데 대인관계에 비결이라도 있나요.
"한국인의 특징인 '정(情)'이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도 통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역지사지라고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남을 잘 배려해야 돼요.입으로 하는 얘기 있고 몸으로 하는 얘기 있고 마음으로 하는 언어가 다를 수 있듯이 일관성 있게 하면 언어가 달라도 금세 친구가 돼요.외국인을 대할 때 솔직 담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가족 얘기 좀 해주세요.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선봤어요. 선보고 두 달 만에 결혼했으니 연애기간이 짧았던 셈이죠.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호텔 커피숍에서 선을 보고 나와 계산하려는데 마침 그날 지갑을 놓고 왔어요.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와이프가) 커피값을 몰래 건네주더라고요.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잡았습니다."
-아들이 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대교에서 일하나요.
"큰 아이는 대교와 관계없는 자기 회사를 경영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보스턴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군 제대 후 자꾸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해 이왕이면 '큰 도시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보스턴에 보냈어요."
-자녀분들은 둘 다 유학파인가요.
"집사람한테 핍박을 받는 이유가 애들 일찍 유학 안 보냈다는 것입니다.저는 전체적으로 한국 문화를 배우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대학원쯤 돼서 유학을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애 엄마의 생각은 그게 아니더라고요.일찍 유학 보냈으면 쉽게 좋은 대학 들어갔을 텐데 길을 막았다고 잔소리를 많이 들어요."
-교육자인 만큼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진짜 아픈 데를 찌르네요.'대장간집 식칼이 녹슨다'는 말이 있죠.자기 자식을 자기가 가르치기가 참 힘들어요.객관적으로 자기 자식을 바라보기가 어려우니까요.'참을 인(忍)'자 써가면서 키운다고 할까요.부모의 욕심은 한이 없으니까.최대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아들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다만 '잘했다' 싶은 것은 아이들이 모두 돈에 대해 소탈하다는 것입니다.못사는 동네 학교만 보내서 그런가봐요.올해 처음 큰애에게 세뱃돈으로 10만원 줘봤는데 입이 찢어지더라고요."
-재테크를 따로 하나요.
"솔직히 별로 안합니다.주식을 연습 삼아 해본 적이 있는데 제대로 했다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부동산 투자는 안 한다는 게 원칙입니다.선조가 물려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돈을 벌기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물론 주변에서 사라고 했던 땅이 오르거나 하면 배는 아픕니다.(웃음)"
-회사 경영하면서 제일 어려운 점은 뭔가요.
"직원들과의 의사소통이 제일 힘들죠.제가 진심으로 얘기해도 직원들이 액면 그대로 못 받아들일 때가 있어요.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자기 느낀 대로만 생각하지 남을 배려하거나 이해하려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아요.특히 젊은 친구들은 명석한데 인내하거나 기다리는 맛이 부족해요.이 점만 보충된다면 나무랄 곳이 없는데."
-직원들 중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하나 직원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말씀하는 편인가요.
"애정이 있는 직원일수록 돌려서 말하면 안 돼요.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제대로 의사가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고.쓴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애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직원들도 그 점은 이해해 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정리=송형석 기자/사진=허문찬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