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한국경제신문사 17층 회의실에서 열린 노·사·정 간담회에는 명실상부 국내 노사관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을 비롯해 이수영 경총 회장,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등 사용자 측 대표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등 양대 노총 수장이 머리를 맞댔다.

최근 직업훈련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에 맞춰 이원덕 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계민 한국경제신문 주필의 사회로 2시간여 진행된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1987년 6·29선언 이후 국내에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등장한 지 20년이 되는 올해,그간의 전투적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노사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사회=올해는 1987년 우리 사회에 노동운동이 본격화한 지 20년째 되는 해다.

최근 한국노총의 '실사구시(實事求是)',민주노총의 '대화노선' 등 영향으로 상생의 노사문화 기류가 감지되고 있지만,기업들은 여전히 노사 문제에 걱정이 많다.

▲손경식 회장=무한 경쟁과 급속한 기술 발전의 시대에서 노사관계도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노사관계가 '분배' 중심의 '대결적' 관계였다면 앞으로는 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사가 같이 노력하는 '생산' 중심의 '협력적' 관계로 변해야 한다.

유럽에서도 오일 쇼크 이후 1980년대부터 노동운동이 이런 방향으로 변해 왔다.

다소 성급한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노사관계가 협력적으로 변해가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다행이다.

▲이수영 회장=지난 20년간 국내 노조는 사회 투명성과 민주 발전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도 해왔지만,이제는 노조가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고용 창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데,생산성에 비해 턱없이 높은 고임금이 고용 창출을 가로 막고 있다.

고임금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이는 기업 창업과 고용 창출을 저해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임금 안정을 통해 고용과 국민소득을 늘리면 자연스레 분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이석행 위원장=노동자의 임금이 너무 높아서 기업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노동자들이 과연 고임금을 요구하고 있는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세계적으로 사교육비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나라가 한국이다.

의료비,주택 문제 등도 노동자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올해 민주노총은 산별교섭을 통해 교육비 병원비 주택문제 등 사회 정책들로 이슈를 유도해갈 것이다.

▲이 회장=우리 속담에 '남대문에서 뺨 맞고 동대문에서 화풀이한다'는 말이 있다.

주택비용 생활비용 등 사회 비용이 높아서 노동자들이 힘들다고 했는데 그걸 기업에 내라는 것이 문제다.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인건비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걸 초과해서 요구하면 기업이 자꾸 문을 닫는다.

현재 국내 기업 근로자의 월급은 높은 편이다.

그러나 가구당 수입은 적은 것이 문제다.

어떻게든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서 가구당 일하는 사람 수를 늘리는 길밖에 없다.

▲손 회장=현재 우리 기업들은 한계에 부딪쳐 있다.

기업이 힘들면 결국 고용 불안으로 이어진다.

유럽 노조의 변화도 고용 불안에서 출발해 이를 막기 위해 변화를 택한 것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세계 61개국의 노동운동을 평가하면서 한국을 최악의 노사환경 국가로 꼽았다.

노사관계 개선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용득 위원장=한국노총의 운동 노선은 '사회개혁적 노동조합주의'다.

노조가 책임있는 사회 주체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 변화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특수 환경에서 만들어진 대립과 투쟁의 논리만으로는 안 된다.

운동의 기본틀은 대화와 협상이다.

▲이상수 장관=현재 우리는 선진국에 진입하는 중흥의 계기를 만들 것이냐 주저앉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사회 각 계층의 화합이 필수적이고,특히 노사가 뭉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상호 신뢰를 어떻게 키우느냐가 관건이다.

♥이원덕 직업능력개발원장=지금은 기업이나 국가나 '사람이 희망'인 시대다.

그러나 사회 전 계층이 고용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이에 적절히 대응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향후 노사관계는) 기업에는 경쟁력 향상을 꾀할 수 있고,노동자에게는 고용의 안정성을 확보해주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사회=올해 산별노조가 이슈인데 여기에 대해 노사 간에 견해 차이가 큰 것 같다.

▲이석행 위원장=한국 노사관계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려면 산별노조가 자리잡아야 한다.

기업별 노조 체제 아래서는 노조 간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지고 기업 부담도 더 커진다.

산별노조를 통해 교육비,의료비,주택비용 등에 대해 제도 개혁이 이뤄지면 기업 부담이 사회적 책임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 회장=산별교섭에 대해 논의하려면 산별교섭에 대한 정확한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산별교섭을 하더라도 한 번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처럼 중앙 단위에서 한 번,지역 단위에서 한 번,어떤 경우 개별 기업에서 다시 한 번 한다고 하면 기업들 입장에서는 너무 복잡하고 부담스럽다.

▲이용득 위원장=산별노조 체제가 되면 교섭이 많아지고 분규가 확대된다고 우려하는데 원래 한 번 교섭하는 것이다.

지부별 협약은 보충 협약 부분이다.

분규도 대형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

금융산업노조의 경우 올해는 사용자 단체가 법인화한다.

▲이 회장=우리나라는 기업별로 사정이 달라 한데 묶어서 얘기하기가 힘들다.

금융업계의 경우 (기업 간) 격차가 크지 않지만 제조업은 다르다.

▲이석행 위원장=기업별 노조 아래에서는 대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청 중소기업에 지속적인 코스트 다운(비용 감축)을 요구하지만,산별노조로 묶이면 이렇게(불합리하게) 강요할 수 없다.

▲손 회장=현재 외국에서는 산별교섭 제도를 취하던 나라들이 개별 교섭으로 바꾸고 있는 추세다.

기업이 부담스러워 하는데 이것을 법으로,제도로 강제한다는 것은 무리다.

▲이 장관=산별교섭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중복 교섭과 대규모 정치파업 등을 우려하지만,달리 보면 교섭비용을 줄일 수도 있고 기업 내에서 풀 수 없는 비정규직 문제 등도 큰 차원에서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를 만들기보다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본다.

▲이 원장=성공적인 산별체제 정착을 위해서는 노조 스스로 힘의 사용을 절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독일 금속노조인 '이게 메탈(IG Metal)'의 경우 파업시에는 75%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고,파업 종료시에는 25% 이상 찬성만으로 풀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큰 힘이니까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산별체제에서는 운동의 아젠다도 달라져야 한다.

과거 분배 중심 노사 문제 대신 능력 개발 중심으로 가면 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가고,근로자도 평생 고용의 안정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올 7월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있다.

노조와 기업 모두 불만이 많은데,비정규직 문제를 어떻해 풀어가야 한다고 보나.

▲이용득 위원장=근로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고용 안정성을 임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노조는 임금을 양보하고,사측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고용을 보장하는 윈윈 전략을 택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은행이 시행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좋은 방향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보호법을 악용해 2년 계약 완료 전에 해고하고 용역직으로 돌리는 사례에 대해서는 노·사·정이 실태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감독해야 한다.

▲이석행 위원장=기간제에 대한 규정이 철폐돼야 한다.

현재 법 규정은 비정규직을 더 양산하고,고용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대부분 제조업 현장이나 경비직 등 열악한 업종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분들은 6~7년이고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2년 내에 잘리는 아픔을 겪는다.

법안 보완을 하지 않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안감과 파견업 활성화만 부추길 것이다.

▲이 장관=자발적인 비정규직보다는 비자발적 비정규직이 문제다.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50% 수준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용 안정성보다 차별 해소가 관건이다.

정규직 직원들은 기업으로부터 직업훈련 기회가 많지만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비정규직은 교육 기회가 없어 계속 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이 회장=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길 역시 궁극적으로는 일자리 창출이다.

비정규직 문제도 일자리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다.

창업도 자꾸 늘려야 한다.

고용에 대해서는 유연성을 갖고,임금에 대해서는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또 다른 측면은 근면성의 문제다.

어떤 경우에 보면 비정규직은 대부분 게으르고 노력을 덜해 결국 낙오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노력을 배가하도록 사회적으로 채찍이 필요하다.

▲이 장관=경제가 활성화하면 양질의 일자리가 많이 생겨서 완벽하게 비정규직도 없앨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장의 실패가 분명이 있고 경쟁을 강조할 때 낙오가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아무래도 강자인 기업이 배려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원장=자유시장 경제에서는 '1물1가' 원칙이 기본인데,같은 능력과 생산성을 가진 비정규직이 같은 노동으로 다른 임금을 받으면 반시장적이고 사회적으로도 비효율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규직은 지나치게 보호받고 비정규직은 지나치게 보호받지 못한다.

가능하면 노사가 조금씩 양보해서 기업은 가능한 정규직을 많이 뽑고 노조는 대신 임금의 유연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회장=기업들은 지금도 고용의 유연성만 확보되면 사람을 더 뽑겠다고 얘기한다.

사람을 뽑지 않는 기업에 물어보면 '한 사람 내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자칫 잘못 뽑았다 경을 칠려고 그러느냐'는 반응을 보인다.

고용의 유연성만 확보되면 기업들은 분명히 인력 채용을 늘릴 것이다.

▲이 장관=최근 한 기업을 방문했는데,기업 관계자가 핵심 분야에서는 숙련공을 키우지만 단순 업무에 대해서는 자동화하거나 비정규직을 쓰는 것이 낫다고 하더라.개인적으로 할말이 없었다.

결국 고용의 유연성을 열어 주면서 차별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원장=학력 격차로 인해 빈곤이 세습된다고 하는데,비정규직의 경우에도 능력 개발의 격차로 비정규직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비정규직의 능력 개발 기회가 정규직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개인적으로 능력 개발이 안 되니까 계속 비정규직에 머물고 고용 불안에 빠진다.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의 35%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능력 개발 중심의 노사관계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사회=노사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노사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 많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용득 위원장=정부는 지원자 역할만 하고 노사가 할일들을 찾아야 노사관계가 질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노사 간에 같이 일할 거리를 찾은 것이 '노사발전재단'이다.

한국노총의 입장에서는 투쟁하던 칼을 칼집에 꽂고,대신 호미와 괭이를 들었지만 텃밭이 하나도 없다.

재단을 텃밭으로 해서 경작지를 넓혀 나가려고 한다.

노·사·정 합의에 의해 지난해 11월30일자로 만들었고 올해 22억원의 예산 지원을 받아 최근 첫 이사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할일이 많아서라도 길거리 투쟁을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 장관=국제노동기구(ILO) 총회 참석차 프랑스에 갔을 때 고용지원센터를 방문했다.

국가가 돈을 내는데도 불구하고 노사가 이사회에 참여해 공동으로 일하더라.오스트리아의 경우에도 노사가 같이하는 사업을 많이 봤다.

앞으로 노사가 함께 참여해 필요한 사업을 많이 하면 정부도 적극 지원할 생각이다.

▲이 원장=독일의 직업훈련연구소에 가봤더니 거기에서도 사용자 대표 8명,노동자 대표 8명, 공익 전문가 5명 등으로 노사 숫자를 맞춰놨더라.노사 상생이 가능한 분야에 대해서는 파트너십을 쌓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능력 개발이 이를 위해 좋은 분야라고 본다.

▲이용득 위원장=미국에서도 노사발전재단과 같은 움직임이 10년 전부터 있었다.

우리나라가 경제규모는 11위인데 노사관계는 60위권인 이유가 노사관계가 제대로 없었기 때문인데 노사발전재단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선진국이 100년 동안 만든 선진 노동문화를 우리는 10~20년 만에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 정책만으로는 안 된다.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도 안 된다.

노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회장=노사발전재단은 노사가 일을 같이 해보자고 한 몸뚱이로 만든 것이다.

조만간 민주노총도 참여하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 취지는 노사관계를 발전시켜 나라 경제를 살리고,근로자의 근무환경도 개선시켜 잘 살자는 것이다.

노조는 조합원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조직이다.

▲이용득 위원장=(양대 노총 통합에 대해) 노동운동은 1국 1조합 원칙이 맞다.

단결하면 단결할수록 힘이 두 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네 배가 되는 것이다.

조합원들의 의사를 물으면 70~80%는 합치는 것을 지지한다고 본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활동가들의 입장이 달라 통합이 안 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양대 노총이 통합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이석행 위원장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석행 위원장=(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소이부답(笑而不答)이죠.

정리=윤성민/문혜정 기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