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춘수 시인의 마지막 추천을 받은 제자이며 그의 장례식에서 조시를 낭독하기도 한 심씨는 55편의 시를 통해 인간의 숙명적인 비극과 그 너머를 바라본다.
'비명''섬''죽음''초승달' 등 시집에 등장하는 시어들은 대체로 어둡고 음울하다.
'혀는 말을 지우고,눈은 밤과 낮을 지우고,짧은 손톱으로는 늦게까지 상처들을 지웠나 보다.
/모두 닳아 없어지고 기다란 뼈와 머리카락만 남았다.
/빗자루처럼 바닥에 던져져 있다.
축축한 바닥을 쓸고 가려 했나 보다.
(중략)
이제 편히 쉬세요.
/뼈와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자 빗자루 형체가 온데간데 없다.
/저 여자 일상을 지우는 순간'('온몸이 지우개가 된 여자'중)
"언젠가 남편이 저보고 시 쓰지 말랬어요.
너무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라는 게 이유였죠.그런데 제 경우엔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만 보면 시를 쓸 수 없어요.
물론 기쁘고 즐거운 상황에서도 시를 쓸 순 있겠지만 그럴 땐 주위 사람들과 웃으며 어울리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그의 시가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함께 걷던 '거리'가 있다/함께였는데 '거리'를 둔다"('길을 길들이는 법'중)고 쓰거나 '천남성'이라는 독초(毒草) 이름에서 '첫 남성'을 떠올리기도 하는 등('천남성'중) 사뭇 경쾌한 리듬을 발산할 때도 있다.
이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시의 답답함과 무거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도적 장치의 하나"다.
"이미지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제 시가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한 번쯤 곱씹어 볼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시인의 일이 아닐까요?"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