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泳世 < 연세대 교수·경제학 >

정보기술(IT)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경제의 견인차다. IT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6%를 넘고 경제성장 기여율은 자그마치 41%에 달한다. 자동차와 함께 최대 수출효자이자 돈줄이다. 초고속인터넷 보급률 1위,CDMA 방식 이동통신 종주국,반도체 기술개발 신기록 질주,와이브로 세계 최초 상용화 등 그간 한국 IT의 수식어는 요즘 한국을 빛내고 있는 스포츠영웅에게나 붙을 법한 찬사였다. 그토록 잘 나가던 IT 발목 잡기에 성공한 것이 있다. 규제왕국이란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한국의 막강 규제다.

세계경제포럼(WEF)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IT 인프라는 아직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이를 운용하는 법과 제도는 낙후돼 있다. 기업의 인터넷 활용도,초고속인터넷 가입자,인터넷 학교 보급률,전자정부 준비도 등은 모두 세계 5위 안에 든다. 그러나 과도한 IT시장 규제,세제(稅制)의 비효율성,창업절차의 복잡성,낙후된 벤처캐피털 등 IT를 둘러싼 사회 경제적 환경은 형편없다. 한국의 IT 경쟁력 순위는 전년보다 4단계 떨어져 세계 19위라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훨씬 더 걱정스럽다.

통신과 방송의 융합은 이미 10년 전부터 예상됐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선진국들은 발 빠르게 법과 제도를 고쳤고 그 고속도로 위에 기업들이 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통방융합의 꽃이라 불리는 인터넷TV(IPTV) 서비스의 경우 주요 기간통신사업자와 장비 및 콘텐츠업체들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나 출발선을 떠나지도 못하고 있다. 관련부처인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 간 밥그릇 싸움에 방송노조,케이블사업자,국회,국가위원회까지 합세한 소모적 정쟁(政爭)에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시장지배력에 관한 동일 사안을 놓고 공정거래위원회와 통신위원회가 겹치기로 규제의 칼을 휘두른다. 이중(二重) 규제도 문제지만 일관성 없는 규제는 더 문제다. 휴대폰 보조금 정책의 경우 정통부는 내년 3월까지 한도 내 보조금 지급만 허용하고 있지만 공정위는 이 같은 행정지도가 소비자의 후생(厚生)을 해치므로 자율경쟁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가 불거지자 정통부는 휴대폰 보조금 지급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현실화 방안을 내놓기는 했으나 정책혼선 기간에 기업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기술표준이나 진입 규제는 압권이다. 2001년 제3세대 이동통신 IMT-2000 서비스사업자를 선정할 당시 모든 기업은 시장성이 확실한 비동기식(W-CDMA) 기술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정통부는 CDMA 종주국이라는 위상을 이어가겠다며 글로벌 통신시장에서 외톨이나 다름없는 동기식(cdma2000)을 고집했고 LG텔레콤에 억지춘향격으로 동기식 사업권을 할당했다. 그 직후 세계 통신업계에서 이미 대세였던 비동기식으로 완전히 돌아섰으며 동기식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 퀄컴사마저 투자를 중단함으로써 동기식 사업은 아예 불가능해져 버렸다. 결국 왕따가 돼버린 LG텔레콤은 1000억원 가까운 돈만 날린 채 2006년 사업을 포기했다.

휴대폰 무선인터넷 운영시스템인 위피(Wipi) 탑재를 의무화하는 규제도 비슷한 사례다. 정부의 '우리 기술 우리가 지키기' 고집 때문에 무선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대다수 소비자들도 위피 탑재 비용으로 5만원 이상 지불하고 있다. 특정 기술표준에 대한 정부의 집착과 그로 인한 규제만 자유화되더라도 소비자들은 다양한 모델을 더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과잉규제의 1차 책임은 그것을 통해 조직과 권한을 유지하려는 담당부처에 있다. 그리고 2차 책임도 정부에 있다. 국가 장래와 산업 경쟁력을 위해서라면 일부 이익집단이나 시민단체를 밀어붙여서라도 정책의지를 관철시켜야 진정한 공복(公僕)이다.

말뿐인 일몰제 덕분에 날로 쌓여가는 규제총량.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못한 규제경쟁력. 수도권,출자총액,주택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차원에 얽혀 있는 규제그물. 모쪼록 IT에 이어 제2,제3의 희생산업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