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일본 도쿄 북부 부도심인 이케부쿠로역 앞 미즈호은행.4개의 외화예금 창구 앞에 50~60대 고객 30여명이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창구에는 '해외 저편에도 나의 미래가 분명히 있다'는 문구와 함께 '외화정기예금 특판상품'을 소개하는 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다.

만기에 따라 초기 1~3개월간 연 13%(달러화)에서 연 25%(뉴질랜드 달러)까지 파격적 이자를 준다는 솔깃한 내용이다.

창구의 다카하시 히로미 행원은 "올해부터 정년퇴직하는 단카이(團塊·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금을 유치하기 위해 특판상품을 내놓았는데 반응이 너무 좋다"며 "오후엔 고객들이 밀려 2개의 임시 창구까지 만든다"고 말했다.


경기 회복과 단카이 세대의 본격적인 정년퇴직으로 목돈을 쥐게 된 일본인들이 외화예금 등 외환 투자에 몰리고 있다.

연 0.5%도 안 되는 일반 정기예금 금리에 지친 이들이 엔화를 달러로 바꿔 고수익 외화 자산에 적극 투자하고 있는 것. 개인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이자가 싼 엔화를 빌려 고수익 외화 자산에 투자하는 것)인 셈이다.

개인들의 뭉칫돈이 외환 투자로 몰리자 금융회사들도 고수익 외화예금과 투자신탁 상품 등을 내놓으며 '개미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를 부추기고 있다.

개인 엔 캐리 트레이드로 인한 외환 수요는 도쿄 외환시장 거래액의 20~30%를 차지할 정도까지 불어 이젠 '엔화 약세'의 핵심 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외화예금과 외화신탁을 합친 일본 가계의 외화 자산은 작년 말 현재 약 40조300억엔(약 320조원). 2003년 9월 20조엔을 돌파한 지 3년여 만에 배로 급증했다. 작년 한 해 증가분은 7조5000억엔으로 무역흑자액 7조9000억엔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기업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개인들이 고스란히 들고 나가 외국에 투자한 셈이다.

엄청난 무역흑자에도 불구하고 엔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외환 투자에 나선 일본인들은 투기적 거래도 서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급팽창한 '증거금 외환거래(FX 거래)'.금융회사에 일정액의 증거금을 맡기고 그 액수의 20~30배만큼 인터넷으로 외화를 살 수 있는 환전 거래다.

예컨대 개인이 10만엔(약 80만원)을 증거금으로 맡기면 언제든지 온라인으로 200만~300만엔(1600만~2400만원)어치의 달러를 살 수 있다.

일종의 외환 파생상품으로 환차익을 노린 전형적인 투기 거래다.

일본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FX 거래를 위한 개인들의 계좌 수는 지난 3월 말 64만개,증거금 잔액은 6678억엔에 달했다.

1년 전 33만계좌,3781억엔에서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난 것.지난해 FX 거래에 따른 개인들의 외환거래액은 약 200조엔으로 추정된다.

도쿄 외환시장 전체 거래액의 20~30% 규모다.
도쿄 금융선물거래소 관계자는 "지난해 엔화 약세로 FX 거래에서 돈을 번 사람이 많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대학생부터 정년퇴직한 노년층에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FX 거래 상품을 파는 전문 중개회사와 온라인 증권사만 100여개에 달한다.

지난달부터는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증권 산하의 조인베스트증권도 이 거래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은행 예금밖에 모르던 일본인들이 환전 투기에까지 나선 이유는 뭘까.

그 배경에는 불어난 금융자산과 일본의 초저금리가 겹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단카이 세대가 퇴직하면서 일본 가계에는 퇴직금 등 목돈이 생겼다.

퇴직한 노년층은 이 돈을 굴려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일본 은행의 1년 정기예금 금리는 연 0.35% 안팎이다.

이 금리로는 생활비가 안 나온다.

일본인들이 높은 이자에 환차익까지 볼 수 있는 외환 투자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일본 캐피털파트너스증권 석송규 이사)

실제 단카이 세대의 퇴직금은 50조엔 이상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경기회복으로 개인들의 소득도 늘어 지난해 일본 가계의 자금잉여(금융자산-금융부채)는 전년대비 2.7배인 17조7984억엔에 달했다.

그러나 이 돈을 굴리기에 일본의 금리는 너무 낮다.

작년 7월 제로(0) 금리를 탈피했다곤 하지만 단기 정책금리가 여전히 연 0.5%다.

미국(연 5.25%)과 비교해 4.75% 포인트나 낮다.

어쨌든 개인들의 엔캐리트레이드는 최근 엔화 약세의 핵심 요인이다.

외환거래 중개회사인 외환토도콤의 타케우치 준 상무는 "개인들의 특징은 헤지펀드나 기관이 엔캐리를 청산해 엔화가 오름세를 보여도 계속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한때 기관들이 엔캐리 청산에 나섰는 데도 엔화가 계속 약세를 보인 이유도 여기 있다는 얘기다.

도이치증권의 오오니시 토모오 부장은 "지난 2월말 세계 증시 연쇄 폭락 이후 헤지펀드 등이 엔캐리트레이드를 청산하기 시작해 엔화가치가 한때 달러당 115엔대까지 올라갔었다"며 "그러나 개인들의 엔캐리트레이드는 지속돼 결국 엔화는 다시 떨어졌다"고 말했다.

엔화는 10일 달러당 119.04엔을 기록했다.

그는 "금융자산이 불어난 개인들에게 확실한 대체 투자대상이 떠오르지 않는 한 외화투자는 지속될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엔저도 쉽게 해소되기 어럽다"고 내다봤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