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濟民 < 연세대 교수·경제학 >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 때 지난 2일은 아이로니컬한 날이다그날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마무리했다한편 국회는 연금 개혁안을 부결시켰다이것이 어떻게 해서 아이로니컬한가둘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주지(周知)하는 것처럼 한·미 FTA가 심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지 않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피해 부문에 대한 보상을 잘 하는 것이 관건(關鍵)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돈'이 필요하다한·미 FTA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할 것이기 때문에 그 만큼 필요한 돈의 액수도 클 것이다

과거 우루과이라운드 때 농업부문에만 57조원을 쏟아부은 것처럼 하지 않더라도 큰 돈이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다그 돈은 어디서 나오나물론 재정 지출에서 나온다따라서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문의 지출을 줄여야 한다그런 목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연금 개혁이다이렇게 보면 지난 2일 정부와 국회가 한 일은 완전히 서로 모순(矛盾)인 것이다

이 문제는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앞으로 다른 경제권과도 FTA 협상을 해서 한국이 FTA의 '허브(hub)'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하지 않는가실제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보면 장기적으로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추세일 것이다그러나 여러 경제권과 FTA를 추진하면서 일일이 피해 부문을 보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우선 필요한 것이 노동시장 유연성(柔軟性)이다개방에 따라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노동시장이 유연해서 근로자들이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이동하는 것이 쉽도록 해야 한다물론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단순한 유연성은 근로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안'을 의미할 뿐이다사회안전망이 뒤따라 주어야 한다그런 점에서 개방과 사회안전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에 있다

이런 이유로 복지(福祉) 체제가 잘 갖추어진 유럽이 미국보다 개방을 더 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예컨대 미국에서는 직장에서 의료보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개방이 어려운 반면,유럽은 의료보험이 사회화돼 있기 때문에 개방에 대한 저항이 약하다는 것이다덴마크에서는 기업이 근로자를 고용하고 해고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인 반면,정부가 실업보험은 물론 재훈련을 비롯해서 새 직장을 찾는 것까지 모두 책임진다

물론 유럽식 복지제도를 바로 모방할 필요는 없다여러 선진국의 제도를 비교해서 적절한 것을 선택하면 된다그러나 어떤 제도를 선택하더라도 개방에 따른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 재정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그런 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연금 개혁이다연금의 역설(逆說)은 그 자체가 사회안전망의 하나지만 다른 사회안전망을 옥죄는 굴레처럼 되어 버린 데 있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금 개혁 없이 FTA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국회만 나무랄 수 없다현 정부도 성적표가 나쁘다연금 개혁이 문제가 된 것이 어제오늘이 아닌데,힘이 있던 정권 초기에 추진하지 않고 미루다가 정권 말기에나 추진했다연금 개혁이 한·미 FTA의 성공을 위한 주요 전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에 전력투구한 지난 한 해 동안 연금 개혁을 위해서는 얼마나 힘을 쏟았는가그 위에 재정의 건전성까지 악화됐다작년 한 해 재정은 국내총생산의 4.1%인 34조80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그 전까지 현 정부 하에서 쌓여 왔던 국가 채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린 것이다

한·미 FTA에 대한 전형적 평가는 "잘하면 우리에게 이익"이라는 것이다그러나 한·미 FTA가 체결되는 바로 그날 그 "잘하면"의 한 전제 조건이 무너졌다협상이 타결됐다고 좋아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