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2002년의 한여름 밤.

한 남자가 대형 스크린 앞으로 뛰쳐나와 열정적인 응원전을 펼친다.

그러나 이 응원이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사는 딸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아빠의 절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드디어 터진 골.

승리의 환호에 묻혀 쓰러지는 아이.

그러나 양쪽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이 남자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미친 듯 응원하는 그의 머리 속에는 '아빠,준이가 다 용서해 줄게요.

준이 버린 거,안 찾은 거…'라는 딸아이의 말만 맴돈다.

아이는 소원을 들어준 아빠에게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선물을 남기고 떠난다.

박광수 감독이 8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눈부신 날에'는 너무나 흔한 주제이지만 가슴 저린 가족애를 담아낸 영화다.

박 감독이 과거에 만들었던 '아름다운 청년,전태일''이재수의 난' 등 사회적 주제를 담은 작품들과는 영 다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야바위판을 전전하며 눈마저 성치 않은 종대(박신양)는 외국으로 입양갈 예정인 일곱 살짜리 딸 준이(서신애)와 함께 지내면서 점차 사랑에 눈뜨게 된다.

영화는 '아빠와 함께 월드컵 응원을 가고 싶다'는 준이의 소원이 이뤄지는 절정부를 향해 한 단계씩 뜨거워진다.

특별히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도 별로 없고 억지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도 없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다.

대단원은 종대가 준이의 안구각막을 이식받아 '눈부신 날'을 다시 보게 되는 것으로 맺는다.

하지만 종대는 이미 '준이는요,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요'라고 말하는 딸의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 더 이상 눈부실 수 없는 세상과 희망을 발견한다.

절망적인 그들이 햇살 가득한 해변에서 투우 놀이를 하며 한없이 즐거워하는 짧은 장면은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날'이 언제일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박신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양아치에서 한 아이의 아빠로 변신하는 과정을 잘 소화했다.

서신애의 순수하면서도 의젓한 연기는 자칫 신파조로 흐를 수 있는 장면에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다만 그들이 진짜 혈육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 대목은 절정부의 감흥을 유지하는 데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잔잔한 가족애를 되새겨보는 관객들에게 '꼭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라도 이 같은 사랑은 가능하다'는 것을 애써 '가르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19일 개봉.15세 이상 관람가.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