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 없이 필기 성적만으로 뽑으면 아마도 60∼70%가 여성일 것입니다.

신입사원의 절반이 여성으로 채워질 날이 멀지 않았어요.

" 주요 기업 사장들이 종종 털어 놓는 '고민 아닌 고민'이다.

신입사원뿐만이 아니다.

대리 과장 차장 등 중간 간부급에도 여성이 늘고 있다.

10년 뒤 기업마다 여성 임원이 급증할 인적 토대가 굳건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온갖 어려움을 뚫고 '기업의 별'을 단 1세대 여성 임원들은 후배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을까.

한국경제신문은 이를 위해 국내 주요 대기업의 1세대 여성 임원 8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굳이 여성 임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라면서 "자신만의 브랜드 파워를 키우면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요직에 과감히 도전하라"고 조언했다.



◆인맥(人脈) 딜레마에서 벗어나라

"그건 정말 '꽝'이에요.

사교는 아예 안 해요." "학연,지연요? 덕본 적 없죠." 1세대 여성 임원들에게 네트워크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들이다.

학연,지연에 기초한 인적 네트워크 구축은 남성들과 경쟁하는 여성 직장인들의 고민거리 중 하나다.

1세대 여성 임원들은 '취약한 네트워크'가 약점이지만 또 다른 강점을 찾는 자극제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박미경 한국증권 상무(PB사업본부장)는 "직장 내 대인관계는 분명 약점"이라면서도 "남성들의 인맥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술과 골프 등 남성적인 문화를 깨끗하게 포기한 대신 여성의 섬세함으로 고객에게 집중해왔다"고 말했다.

한경이 실시한 설문에서 '여성 임원의 상대적인 약점'으로 응답자의 42.4%가 '취약한 네트워크'를,18.2%는 '직장 내 대인관계'를 꼽았다.

반대로 '여성 임원의 강점'으로는 '학연,지연에 얽매이지 않는 의사결정'(24.4%)이라는 응답이 '업무능력'(26.6%)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제니스 리 하나로텔레콤 부사장(CFO)은 "사적인 견해를 배제하고 진실된 자세로 원칙을 지키면서 유연하게 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그런 점에서 학연,지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여성들이 오히려 장점이 많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성 임원도 "남자들만큼 밀어주고 끌어주는 분위기가 없다 보니 자연히 외풍을 덜 타는 것도 여성 임원의 강점"이라며 "어떤 측면에서는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도덕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헬프 미(help me)'를 당당히 외쳐라

"남자들이 책상에 가족사진을 두면 가정적이라고 하고 여성이 그렇게 하면 가정에만 매몰돼 있다고 말한다." 조화준 KTF 전무(CFO)의 말이다.

그는 "육아 문제로 괴로워하면 회사에 신뢰를 줄 수 없고 스스로를 관리하기도 어려워진다"면서 "집을 장만하는 시기가 좀 늦어지더라도 육아에 돈을 아끼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충고한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좋은 보모를 과감하게 쓰고 오히려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도 했다.

1세대 여성 임원들은 사내에서는 후배들의 가정과 육아 문제에 대한 상담역이기도 하다.

그들은 '가정과 직장'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혼자서 끙끙대기만 한다면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면서 "당당하게 도움과 협조를 요구하라"고 주문한다.

가정과 직장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배우자의 협조와 희생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

한현미 아시아나항공 이사(환경고객부문장)의 경우 대학 교수인 남편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남편은 지금까지 두 번의 안식년을 받았지만 한 번은 아내를 위해 해외 연구를 포기했고,한 번은 큰 아들과 함께 해외에서 지내기도 했다.

한 이사는 "가정과 직장에서 모두 완벽만을 추구하는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매몰되면 어려움이 왔을 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면서 "오히려 드러내 놓고 고민을 얘기하고 함께 풀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의 브랜드' 이름 석자로 승부하라

여성 임원들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여성 후배들이 진급 등에서 남성들보다 1∼2년 정도 뒤처지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1∼2년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포기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회사 이름을 떼고도 해당 분야에서 이름 석자로 통할 수 있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나간다면 훗날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인아 제일기획 전무(제작본부장)는 입사한 뒤 13년 만에 처음으로 동기들과 같은 시점에 진급자 명단에 올랐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삼성그룹의 첫 여성 임원이 됐고,그의 이름은 국내 광고업계에서는 최고의 브랜드로 통하고 있다.

최 전무는 "뭐가 돼야겠다는 목표를 두지 않았던 것이 나를 바르게 이끈 원동력"이라며 "기업이 마케팅의 결과로 결국엔 브랜드를 남기듯 나만의 브랜드 파워를 어떻게 키워 나가느냐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설금희 LG CNS 상무도 임원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내 이름이 어딘가에 남는다고 생각했고 '내 이름이 나다','내 이름에 먹칠하지 말자'고 늘 다짐하면서 나의 브랜드 관리에 신경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고 설명했다.


◆감성·감동의 리더십을 보여라

A사의 여성 임원은 최근 승진한 직원들에게 카드를 보냈다.

기혼자는 배우자에게 미혼자는 부모에게 "시간 빼앗아서 미안해요.

회사에서 너무 잘 하고 계세요"라는 요지의 글을 직접 써 보냈다.

B사의 여성 임원은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선물을 준다.

여성 특유의 감성 리더십이 발휘된 사례다.

여성 임원들은 '남성적 리더십과 차별화한 여성적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고 강조한다.

신대옥 국민은행 부행장(PB담당)은 "지점장 시절을 돌아보면 누님 같고 엄마 같은 리더십이 힘을 발휘했다고 여겨진다"면서 "여장부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여성 임원들은 대부분 '선례(Role Model)'에 대한 부담도 털어놨다.

"여성 임원의 실수나 잘못을 침소봉대하는 경우가 있어 더 조심스럽게 일한다"는 말에서 그 부담의 일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후배들이 임원이 될 자격을 갖추도록 돕는 일도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여성 임원들은 "내가 잘못하면 그 피해는 후배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면서 "나의 실패는 나만의 실패가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김수언/주용석/류시훈 기자 indep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