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萬雨 < 고려대 교수·경제학 >

인간 수명의 연장과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화에 따른 핵가족 중심의 가족제는 노후 생활 보장을 위한 국가 역할의 증대를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한 핵심 제도인 국민연금제도는 노령·퇴직·불구·질병·사망 등에 따른 소득 상실에 대해 정기적으로 확정액의 금전 급부를 행하는 공적(公的) 연금제도다.

현재 지구촌에는 170여개의 나라가 연금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들 중 연금재정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선진국일수록 저성장·저출산·고령화 등의 문제로 오히려 고민은 더 심각한 실정이다. 지금까지 선진국의 공적 연금 개혁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시사점은 저성장과 인구 고령화로 기존의 연금제도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국가별로 서둘러 재정 안정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각국의 중요한 제도 개선(改善) 방향은 대부분 공적연금의 급여 수준을 과거에 비해 낮추고 부담수준은 인상하는 것이었으며 우리의 개혁안도 정당 간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재정안정화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런 직접대책 이외에 국민의 정치적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급개시 연령의 상향조정,인구 및 경제변수를 급여 산식에 포함시키는 자동안정화 장치 도입을 통한 간접적인 재정안정화 방안도 채택하고 있다. 나아가 다층(多層) 소득보장체계 구축을 통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정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제도 개혁 노력 등이 진행 중에 있다.

정부는 제 2차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마련해 2003년 10월 국회에 제출했으나 3년 동안 개혁안 심의조차 못하다 지난해 11월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지난 2일 임시국회에서 이마저 각 당의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의해 부결되고 기초 노령연금법안만이 통과되는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보험 방식의 현행 국민연금 제도가 안고 있는 사각지대를 대폭 축소하기 위해 현행 공공부조 제도를 확대·개편한 기초노령연금제도는 조세를 재원으로 65세 이상의 노인 60%를 대상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및 차상위(次上位) 저소득 노인은 매월 10만원,일반노인은 7만원을 각각 차등 지급함으로써 특정 자산규모 이하 노인의 생활안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입법화됐다.

기초 노령 연금의 입법화는 사각지대(死角地帶)의 해소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노령인구의 급격한 증가추세를 감안한다면 정부의 재정부담 또한 눈덩이처럼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일부 선진국에서는 재정부담 때문에 기초연금을 없애는 추세임도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신중히 고려돼야 할 것이다.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우리 국민은 안전 불감증(不感症)에 걸려 있다고 자기비판을 하지만 국민연금에 관한 한 우리의 안전의식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5년마다 정기적,지속적으로 반복해야만 하는 재정계산 과정에서 연금제도의 문제점이나 위험요소가 발견되면 개선할 수 있는 조기경보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수정안이나 정부나 각 당이 마련한 타협안이 완벽하지 아니하더라도 추후 추가적 개선의 기회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저출산·고령화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제도 정비의 시간적 여유가 없을 정도로 연금개혁은 시급한 과제이므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연금개혁 지연으로 늘어나는 잠재부채 규모는 정부가 그동안 발표해 온 것(하루 800억원꼴)보다 훨씬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는 대선 등 중요한 정치 일정이 예정돼 있어 자칫하면 정치논리에 경제정책이나 제도개혁이 표류(漂流)할 가능성이 그 어느 해보다 높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여야가 정치적 논리를 초월해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한 결단을 부디 내려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