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의범인이 재미동포 1.5세인 조승희씨(23)로 밝혀지면서 교육 이민과 조기 유학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여덟 살 때 이민 온 조씨가 문화적·정신적 부적응으로 사건을 저질렀다는 근거는 아직 없다.

탁월한 실력을 보이는 학생들이 많은 만큼 조기 이민을 통째로 문제삼는 것은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연 아이들 교육을 위한 교육 이민이나 어릴 때 아이들을 유학 보내는 조기 유학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한번쯤 돌아다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미국 뉴저지주 버겐 카운티에 사는 문모씨(45)는 요즘 고민이 하나 늘었다.

데리고 있는 조카 문모군(15)의 행동이 달라진 것.형의 아들인 문군은 중학교 1학년 때인 2년 전 '나홀로 유학'을 왔다.

인근 사립학교에 다니는 문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생활에 순조롭게 적응하는 듯 보였다.

영어가 모자라는 것을 빼면 성적도 괜찮았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처음엔 '사춘기려니'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비슷한 처지의 한국 학생들과 어울려 시내를 쏘다니는 모습도 목격됐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문씨는 조카를 불러 대화를 시도했다.

'역시나'였다.

조카는 갈수록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다고 털어놨다.

겉으로는 친절하기 짝이 없는 미국 학생들이 좀처럼 끼워 주지 않으려고 해 또래 한국 학생들과 어울린다고 했다.

문씨는 조카에게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조카는 그러나 "한국 학교는 싫다"고 매달렸다.

문군이 겪고 있는 갈등은 다름 아닌 언어적·문화적 갈등이다.


아무리 일찍 미국에 와도 누구나 갈등을 겪는다.

'침묵이 금'이라고 배웠던 한국 학교와 달리 미국 학교는 발표와 표현을 우선시한다.

문화적 차이도 절감하게 된다.

갈수록 겉돌게 되고 고립적인 생활에 익숙하게 된다.

말이 통하고 문화적 정서감이 비슷한 한국 학생들과 어울려 '딴짓'도 하게 된다는 게 경험자들의 전언이다.

아홉 살 때인 1986년 부모를 따라 이민 온 김태형씨(30)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김씨가 자리 잡은 동네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1년도 안 돼 영어를 익혔고 자연스럽게 한국어는 잊어버렸다.

김씨는 고등학생이 될 때만 해도 큰 정신적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민 온 만큼 사고방식이나 행동도 미국 친구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갈등은 시작됐다.

철이 든 미국 친구들이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김씨는 그때서야 '친구들이 왜 그럴까'를 생각했으며 비로소 '인종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했다고 한다.

한동안 방황하는 김씨를 잡아준 것은 좋아하는 운동과 아버지라는 존재였다.

운동은 모든 걸 잊게 했다.

교육 우선의 엄한 아버지는 자신의 일탈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김씨는 뉴욕대학 경영학석사를 마치고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됐다.

"한인 1.5세나 2세라고 해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며 "자칫하면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주변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게 김씨의 회고다.

그래도 문군과 김씨는 나은 경우다.

집에 가족이 있어 강제적으로나마 일탈을 제어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하숙집에 맡겨지거나 기숙사가 딸린 사립학교(보딩스쿨)에 보내지는 아이들과 어머니와 함께 조기 유학 온 이른바 '기러기 아이들'은 정신적·문화적 갈등이 일탈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정신적 방황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할 때인 고등학생 때 최고조에 달한다.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문화적 차이에 따른 갈등,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어우러지면서 엇나가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교민 윤영호씨(46)는 "가족과 헤어지는 조기 유학은 득보다 실이 많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그렇다고 교육 이민이나 조기 유학이 모두 부정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정신적 갈등은 겪을지언정 이를 잘 극복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이민 온 박상현군(17)은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영재학교인 버겐아카데미에서도 알아주는 수재다.

고교 2학년이지만 이미 수학능력시험(SAT)에서 만점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 친구들과 다를 게 없고 뒤질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생활한다"며 "어릴 때 미국에 온 많은 한국 친구들도 비슷하다"는 게 박군의 자신감 넘치는 말이다.

한국의 조기 유학붐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미 이민국 통계에 따르면 작년 12월 말 현재 미국 내 한국인 유학생은 9만3728명으로 외국인 유학생(63만99명)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조기유학생으로 볼 수 있는 초·중·고교생은 3749명이다.

한국에서 미국을 포함한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난 초·중·고교생은 2000년 4397명에서 2004년엔 1만6446명(이민이나 부모가 해외근무하는 경우 제외)으로 4배 가까이 급증했다.

하늘 모르게 치솟는 교육비와 여전히 획일화된 학교 교육,'왕따'로 대표되는 척박한 학교 문화에다 영어 바람과 자식의 성공 기대감이 어우러져 자아도 갖추지 못한 어린아이들을 외국으로 내몰고 있다.

뉴저지주에서 정신과를 운영 중인 김동철 박사는 "조기 유학생이나 이민 1.5~2세 중 중압감과 고립감에 시달리다 우울증이 심해져 상담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이 상당하다"며 "잘은 모르지만 조승희씨도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원어민 영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아진 만큼 등떠밀기식 조기 유학이 바람직한지를 한번쯤 생각해 볼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