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회 녹십자 사장의 집무실에 가면 20년 된 신문 기사가 액자 속에 스크랩돼 있다.

허 사장은 사무실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종종 이 기사를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한국신용평가에서 1987년 실시한 기업평판조사에서 녹십자가 종합 1위를 차지했다는 게 기사의 내용이다.

실제로 녹십자는 기업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

허 사장은 그 비결로 "만들기 힘들지만 꼭 있어야 될 특수의약품 개발에 우직한 정성을 쏟으면서 한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꼭 있어야 할 특수의약품'이란 바로 백신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녹십자에서 만든 백신을 한번쯤 접종했을 정도로 녹십자는 한국 백신산업의 역사 그 자체다.

녹십자는 그러나 국내 최고 백신 제조 기업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적인 백신 강자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다.


1967년 동물약품을 제조 판매하는 수도미생물약품으로 출발한 녹십자는 설립 초기부터 백신제조에 주력했다.

그로부터 14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끝에 녹십자는 미국의 MSD,프랑스의 파스퇴르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B형간염 백신 '헤파박스'를 개발,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헤파박스는 당시 13%에 달하던 국내 B형간염 보균율을 절반 이하로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도 외화절감에 기여했다.

헤파박스는 이후 세계보건기구(WHO),유니세프 등을 비롯해 60여개 국가 및 국제단체에 보급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접종된 B형간염 백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간 매출액 200억원대의 작은 제약사에 불과하던 녹십자는 헤파박스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액이 500억원대로 수직 상승,일약 국내 제약업계의 선두기업으로 도약했다.

녹십자는 1988년에는 세계 최초 유행성출혈열 백신 '한타박스'를 개발,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뚜렷한 치료제가 없어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알려져 있던 유행성출혈열 퇴치에 기여했다.

그러나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녹십자의 백신사업에 '잃어버린 4년'이다.

녹십자는 2000년에 독일의 바이오 기업 라인바이오텍과의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당시 녹십자에서 분사돼 있던 녹십자백신의 주식 80%를 라인바이오텍에 매각했고,이로 인해 녹십자백신은 외자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나 라인바이오텍이 돈 되는 간염백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하나 둘 매각하기 시작하자,녹십자는 지난 2003년에 백신 사업부를 다시 사들여 백신 사업을 재개했다.

허 사장은 "헤파박스 등을 통해 기술력을 인정받은 녹십자가 다시 백신 사업에 뛰어들자 GSK,사노피아벤티스 등 백신 사업에 주력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사도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다국적 제약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녹십자가 현재 추진 중인 '화순 프로젝트'다.

녹십자는 작년 10월부터 전남 화순에 최첨단 인플루엔자 백신생산 공장건설에 착수했다.

총 3만평 규모의 화순 공장이 내년 완공되면 그동안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 종종 공급에 차질을 빚던 인플루엔자 백신을 자체 기술로 보급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녹십자 자체기술로 인플루엔자 백신을 시범생산 해 본 결과 1개의 달걀로 평균 1.4도즈(1인 접종분량)의 백신을 생산,선진국 평균치(1.0도즈)를 상회하는 우수한 성공률을 보였다.

세계 유수의 다국적 제약사 제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인플루엔자 백신을 녹십자가 대량 공급할 날이 멀지 않았단 얘기다.

이 공장은 또 조류인플루엔자(AI)가 만연할 경우 AI백신 생산 시설로도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허 사장은 "화순 공장 건설로 한국도 이제 각종 인플루엔자에 대비할 수 있는 '백신 안보'를 갖출 수 있게 됨은 물론 해외 시장에도 백신원료 수출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녹십자는 2000년 이후 꾸준한 변신을 시도했다.

우선 2001년에는 상아제약을 인수·합병했고,2003년에는 경남제약을 인수했다.

이에 대한 제약업계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녹십자는 다른 제약사에 비해 일반의약품 부문이 취약했기 때문에 이들 두 회사가 녹십자의 이 같은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나 2003년 대신생명(현재 녹십자생명보험)을 인수하자 제약업계 관계자들은 "삼성 교보 대한 등 빅3가 장악하고 있는 생명보험업에 제약회사가 진출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허 사장은 그러나 "대신생명을 인수한 건 생명보험업 진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토털헬스케어'라는 녹십자의 장기 비전 달성을 위한 포석"이라고 설명했다.

기존의 의료서비스가 아프고 난 다음에 제공되는 '치료적 서비스'에 국한됐다면,토털헬스케어는 질병 예방에서부터 질병 치료,재활 등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의료서비스를 뜻한다.

녹십자는 생명보험을 토털헬스케어 서비스 제공을 위한 '허브'로 육성함으로써 제약 의료재단 등에 걸쳐 있는 녹십자홀딩스(녹십자의 지주회사)산하 자회사들의 시너지를 도모하겠다는 구상이다.

예컨대 녹십자생명보험에서 개발한 토털헬스케어 상품에 가입하면 △신생아 시절에는 녹십자에서 제공하는 제대혈 보관 서비스를 이용하고 △유아기에는 녹십자에서 생산하는 각종 백신을 접종받고 △청장년기에는 녹십자에서 생산하는 우수 의약품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노년기에는 국내 최고 수준의 건강검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녹십자는 현재 산발적으로 제공되고 있는 이 같은 서비스를 보다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데 필요한 솔루션 개발을 위해 지난 2003년에 자회사 GC헬스케어를 설립했다.

허 사장은 "토털 헬스케어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하기 위해서는 병원이 중심이 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 국내외 유수 의료기관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