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여름,진로 마케팅총괄 상무로 있던 한기선 사장이 갑자기 회사에 사표를 내고 호주로 떠났다.

그 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큰 아들과 함께였다.

한 사장은 호주 비자를 받기 위해 아들과 함께 멜버른 랭귀지 스쿨에 등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아들을 유학 보내는데 어떻게 혈혈단신으로 보냅니까." 한 사장은 아들을 유학 보내게 된 이유에 대해 자세히 묻자 "아이고 그 얘기 좀 안 했으면 싶은데"라면서도,자식 교육을 위해 6개월 동안이나 회사를 떠나 있었던 사연을 덤덤하게 들려줬다.

"당시에는 무척 속상한 일이었죠.큰아들 녀석이 어려서부터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애가 본성은 착하고 영리한 것 같은데 어쩌다가 그쪽으로 빠졌나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큰아들 녀석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도저히 학교를 다니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중학교 때 자기한테 얻어맞은 학생들을 상급생으로 만나게 돼 매일 불려 다니느라 맘 잡고 공부를 할 수가 없었던 거죠.외국으로 유학을 보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게 호주였다.

그런데 애만 보내려니 걱정이 됐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한 사장은 "지금 내가 챙기지 않으면 이 녀석의 장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자식 농사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회사에서 기획실 상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시점에서 고민이 없었을까.

"당시 제가 상무 고참이었는데 '에이,전무 늦게 달면 뭐 어떠냐'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아들의 학창 시절 3년이 나의 3년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배경 설명 없이 사표만 휙 던져놓고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당시 한 사장이 근무하던 진로 그룹에선 사표를 수리하지 않은 채 6개월 동안이나 그를 기다려줬다.

"진로에는 늘 고맙고 빚진 기분이죠.아들이 생각보다 영어를 금방 배우고 학교에도 적응을 잘해 6개월 만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월급도 꼬박꼬박 통장에 넣어주셨더라고요."

아버지 속을 썩이던 그 아들은 기대를 버리지 않고 호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현지 기업에 취직해 '글로벌 시티즌'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