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와 야간 대학을 나온 반장식 기획예산처 재정운용실장(51)이 엘리트들의 아성(牙城)으로 정평이 난 기획예산처 차관에 임명돼 화제다.

그는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후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자세로 일해왔다"고 겸손하게 소감을 밝히고 있지만 주위에서는 그를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1956년 경북 상주의 농가에서 2남4녀의 막내로 태어난 반 신임 차관은 어렸을 때부터 고향에서 내로라하는 수재였다.

이안초등학교와 함창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수석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인문계와 실업계를 고민하던 그는 덕수상고(현 덕수정보산업고)에 진학하게 된다.

반 차관은 "당시 농촌에서는 상고 외에 선택의 여지가 크지 않았다"면서 "집안 형편을 생각해 스스로 돈을 벌어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교 시절 전교 석차 1,2위를 다투던 그는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사했고,은행에 다니면서 당시 야간대학 최고였던 국제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하게 된다.

그 와중에 고시공부를 시작해 대학 4학년 때 행시 21회에 합격했다.

반 차관은 "당시 외환은행 임금은 한국 최고 수준이었지만 업무에서 성취감을 얻기 힘들었고 보수적인 사내 문화도 맘에 들지 않았다"며 "공무원 급여 수준은 낮았지만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어 공직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말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이어 1995년에는 미국 위스콘신대 대학원 공공행정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유학 시절 그의 성적(올 A학점)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도전적인 자세와 끊임없는 학구열은 공직생활에서 업무성과로 이어졌다.

반 차관은 1990년대 초반 경제기획원 기획국 총괄사무관으로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드는 데 참여했고 외환위기 직후에는 기획예산위원회 재정정책과장으로 금융구조조정에 직접 나섰다.

이후 기획예산처 예산제도과장,예산총괄과장,예산총괄심의관을 거쳐 재정운용실장(옛 예산실장)까지 예산 업무와 관련한 핵심업무를 두루 맡았다.

2005년에는 청와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기획단장으로 일하면서 공공기관 지방이전,혁신도시 건설계획 등도 수립했다.

일부에선 자수성가형인 반 차관이 부하 직원들에게 너무 엄격하다는 평도 있다.

또 경제부처에서 명문고-명문대 라인을 깨려는 참여정부의 의도 때문에 그가 상대적인 혜택을 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일했던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반 차관은 꼼꼼하고 치밀한데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타고난 성실함으로 무슨 일을 맡기든지 척척 해낸다"고 평했다.

허용석 재정경제부 세제실장이 그의 덕수상고 2년 후배다.

박수진/허문찬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