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여자 나이 마흔을 넘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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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주 < 소설가 >
생애전환기 건강진단을 받으라는 안내문이 날아왔다.
평소 건강한 편이라 의료보험증 쓸 일조차 별로 없었던 나로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내온 우편물이 낯설었다.
더구나 생애전환기라니.만40세와 만66세를 대상으로 무료 건강진단을 해준다는 안내문을 꼼꼼히 읽으면서 나는 계속 그 단어에 붙들려 있었다.
생애전환기.중년에 해당하는 만40세,노령층에 접어드는 만66세의 나이….
이런 안내문까지 받아들고 보니 내 나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작년에 마흔살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만으로는 40세가 되지 않았다고 우겨왔는데….어쨌든 올해 안에 꼼짝없이 40세가 될 터이니 건강을 챙기라고 이렇게 친절히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생애전환기라는 단어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일찍 결혼한 친구들은 벌써 고등학생의 학부모가 돼 전환기를 맞은 듯했다.
그들은 자식의 특목고 입학 여부에 따라 1차 성적표를 받아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젖먹이를 키우는 친구도 있고 초등학교 신입생 학부모 노릇으로 바쁜 친구도 있다.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재혼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다.
몸은 중년(中年)의 전환기일지 몰라도 생활은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형인 것이 40세 여자들의 현재다.
월터 피트킨의 '인생은 사십부터'를 읽다가 "누구도 마흔이 될 때까지는 이 복잡한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같은 구절에 굵은 밑줄을 긋기도 하면서.혹은 "사람이 마흔 이전에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 이후에 하는 일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헨리 포드의 말을 새삼 되새기면서.
하지만 일찍이 피천득 선생은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라고 잔인하게 못 박으셨거니와 실제로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사실의 진술이기보다 희망의 표현일 때가 더 많다.
유독 나이에 대해 민감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요즘은 조금이라도 어려 보이는 얼굴을 선망(羨望)하는 이른바 동안 열풍까지 불어대지 않는가.
굳이 인터넷 댓글 속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마흔 넘긴 여자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더 이상 여자가 아닌 우리들이 동창회를 하던 날,한 친구가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열창할 때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졸업 앨범 속의 그 앳된 얼굴들로부터 20년.어느덧 우리는 청춘이라는 화려한 무대에서 밀려 내려와 있었다.
청춘의 연극은 막을 내리고 이제 생짜로 살아가야 할 여생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난 뒤부터 인생은 진짜 시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분장(扮裝)과 무대 의상에 갇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맨얼굴과 편안한 옷차림으로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여자 나이 마흔을 넘기면 두려울 게 없어진다는데,어쩌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사회적 가면(假面)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꽃의 역할을 벗어나기 힘든 젊은 여성의 자리에서 물러난 홀가분함의 힘이랄까.
분명한 것은,마흔은 생각처럼 그리 끔찍한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평균 수명으로 봐도 마흔은 인생의 중간에 불과할 따름이다.
안정 속에서 의욕은 은근히 끓어오르고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아서 무엇이든 제대로 해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문제는,그런 것들을 세상이 잘 알아주지 않고 제대로 활용하려들지도 않는다는 데 있긴 하지만.어쨌거나 "봄이 사십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라고 피천득 선생은 덧붙이셨으니,나는 우선 이 봄을 즐기고 봐야겠다.
언젠가부터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이 봄도,나의 인생도,모든 인간 관계도,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한다는 자각만으로 모든 것은 금세 소중해진다.
유한성(有限性) 앞에서 애틋하지 않은 게 어디 있으랴.다시금 만물에 대한 애틋함으로 세상을 둘러보게 되는,생애전환기의 봄.
생애전환기 건강진단을 받으라는 안내문이 날아왔다.
평소 건강한 편이라 의료보험증 쓸 일조차 별로 없었던 나로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내온 우편물이 낯설었다.
더구나 생애전환기라니.만40세와 만66세를 대상으로 무료 건강진단을 해준다는 안내문을 꼼꼼히 읽으면서 나는 계속 그 단어에 붙들려 있었다.
생애전환기.중년에 해당하는 만40세,노령층에 접어드는 만66세의 나이….
이런 안내문까지 받아들고 보니 내 나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작년에 마흔살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만으로는 40세가 되지 않았다고 우겨왔는데….어쨌든 올해 안에 꼼짝없이 40세가 될 터이니 건강을 챙기라고 이렇게 친절히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생애전환기라는 단어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일찍 결혼한 친구들은 벌써 고등학생의 학부모가 돼 전환기를 맞은 듯했다.
그들은 자식의 특목고 입학 여부에 따라 1차 성적표를 받아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젖먹이를 키우는 친구도 있고 초등학교 신입생 학부모 노릇으로 바쁜 친구도 있다.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재혼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다.
몸은 중년(中年)의 전환기일지 몰라도 생활은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형인 것이 40세 여자들의 현재다.
월터 피트킨의 '인생은 사십부터'를 읽다가 "누구도 마흔이 될 때까지는 이 복잡한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같은 구절에 굵은 밑줄을 긋기도 하면서.혹은 "사람이 마흔 이전에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 이후에 하는 일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헨리 포드의 말을 새삼 되새기면서.
하지만 일찍이 피천득 선생은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라고 잔인하게 못 박으셨거니와 실제로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사실의 진술이기보다 희망의 표현일 때가 더 많다.
유독 나이에 대해 민감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요즘은 조금이라도 어려 보이는 얼굴을 선망(羨望)하는 이른바 동안 열풍까지 불어대지 않는가.
굳이 인터넷 댓글 속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마흔 넘긴 여자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더 이상 여자가 아닌 우리들이 동창회를 하던 날,한 친구가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열창할 때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졸업 앨범 속의 그 앳된 얼굴들로부터 20년.어느덧 우리는 청춘이라는 화려한 무대에서 밀려 내려와 있었다.
청춘의 연극은 막을 내리고 이제 생짜로 살아가야 할 여생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난 뒤부터 인생은 진짜 시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분장(扮裝)과 무대 의상에 갇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맨얼굴과 편안한 옷차림으로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여자 나이 마흔을 넘기면 두려울 게 없어진다는데,어쩌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사회적 가면(假面)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꽃의 역할을 벗어나기 힘든 젊은 여성의 자리에서 물러난 홀가분함의 힘이랄까.
분명한 것은,마흔은 생각처럼 그리 끔찍한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평균 수명으로 봐도 마흔은 인생의 중간에 불과할 따름이다.
안정 속에서 의욕은 은근히 끓어오르고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아서 무엇이든 제대로 해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문제는,그런 것들을 세상이 잘 알아주지 않고 제대로 활용하려들지도 않는다는 데 있긴 하지만.어쨌거나 "봄이 사십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라고 피천득 선생은 덧붙이셨으니,나는 우선 이 봄을 즐기고 봐야겠다.
언젠가부터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이 봄도,나의 인생도,모든 인간 관계도,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한다는 자각만으로 모든 것은 금세 소중해진다.
유한성(有限性) 앞에서 애틋하지 않은 게 어디 있으랴.다시금 만물에 대한 애틋함으로 세상을 둘러보게 되는,생애전환기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