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의 성패(成敗)는 '시간과의 싸움'에 달려 있다.

건조 기간이 줄어들수록 선주가 배를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그래야 후속 주문도 들어온다.

회전율이 높은 배가 이익도 많이 내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변화무쌍한 선주의 요구에 얼마만큼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느냐가 배의 건조 시간을 결정한다고 한다.

이런 '탄력적 대응'은 많은 문제점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쉽사리 노하우를 쌓기 어렵다.

조선업계에서 오랜 경험이 쌓인 기술자일수록 더욱 '대접'받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상균 현대중공업 기초선박설계팀 부장(48)은 23년간의 노하우가 쌓인 설계 디자이너다.

그는 도면 상의 그림을 '진짜' 배로 만드는 첫 단계인 기초선박 설계를 한다.

배의 기초적인 뼈대를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배의 기본 구조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설계자들이 다른 부품을 쉽게 조립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명함에 새겨진 영어 직함도 '엔지니어(engineer)'가 아니라 '콘스트럭처 디자이너(constructure designer)'다.

선박 건조의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잘못되면 건조가 완성된 배라도 다시 허물어야 한다.

이 부장은 1979년 인하대학교 조선공학과에 입학할 때도 전공을 선택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고 한다.

'배'는 커다란 퍼즐과도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일반 회사의 일은 업무가 어느 정도 손에 익은 다음에는 같은 일의 반복이잖아요.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배의 전반적인 설계 구조를 파악하는 데만 15년이 걸렸다.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새로운 구조의 배가 등장할 때마다 이 부장이 공부해야 할 것이 더 생겼다.

그는 어려운 일을 맡을수록 승부욕이 작용하는 것도 즐겁게 설계 디자이너 일을 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그는 2000년 세계 유수의 오일 메이저 회사인 프랑스 토탈이 주문한 4억5000만달러 상당의 나이지리아 부유식 원유생산·저장설비(FPSO) 공사를 수주했을 때 가장 신이 났다고 한다.

'FPSO'란 유전의 시험탐사 및 생산·저장 하역기능을 갖추고 이동 가능한 원유시추 설비로 심해유전 개발에 주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시도였어요.

그만큼 긴장도 많이 됐죠."

무엇보다 이보다 앞서 일본에서 같은 설비 제작을 시도했지만 주문사가 인도받기를 거부했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150명의 설계실 직원이 이 프로젝트에 달려들었다.

구조에 들어간 강판 종류부터 재질의 등급에 이르기까지 그때까지 사용해온 일반 선박용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2년 동안 밤 10시 이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사흘에 한 번 꼴은 밤을 새웠다.

급기야 위궤양이 걸릴 정도였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항상 기뻤지만 그때는 처음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겁도 났고요."

다행히 설계를 시작할 때 예상했던 기간보다 한 달이나 단축해서 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주문사로부터 만족할 만한 평가도 받았다.

힘든 만큼 배운 것도 많았다.

대형 선박 건조에는 통상 5000~8000장 정도의 설계도면이 필요한데 설계자들의 정보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선박 건조는 불가능하다.

설계 파트의 정보 소통이 수월할수록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하는 것과 효율적으로 하는 것은 다른 문제죠.설계실에서 부하 직원들의 업무를 교통정리하고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부장은 아직까지 세계 선박의 40%를 한국이 생산하고 있지만 중국의 추격을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부가가치선에 대한 투자도 지금보다 더 늘려야 한다고 믿는다.

"중국산 선박의 대부분이 한 척에 4000만달러에 불과한 벌크선이지만 한국의 선박 기술을 빼내려는 그들의 노력은 집요합니다."

요즘 그가 '선박의 도장'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연구 중인 것도 이런 경계심에서 나온 것이다.

3년 전 IMO(International Marine Organization·국제해사기구)는 선체의 모든 문제는 부식을 방지하는 도장 기술 수준에 달려 있다고 발표했다.

이 부장은 도장 작업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끔 구조물의 변경 방법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우리가 1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의 기술력을 보유하는 길밖에 없어요.

지금 제가 고민하는 '선박 도장'도 거기에 한몫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