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가 25일 정부에 건의한 규제개혁 과제는 대부분 매년 반복해서 제기되어온 이슈들이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위한 재계의 '절박한' 주장이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방증한다.

그러나 올해 규제개혁을 요구하는 재계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결연하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타결로 그야말로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과도한 규제가 계속 기업들의 발목을 잡으면 더이상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막판 스퍼트'로 최대한 재계의 입장을 차기 정권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역차별은 없어야

'FTA 시대'를 맞아 재계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해외 경쟁사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

재계는 특히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등 경제력 집중을 제한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규제가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제 국내 기업 간의 경쟁은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됐는데 정부의 시각은 여전히 국내에 머물러 있다"며 "미국 등 선진국 기업들과 비교하면 우리 대기업들은 아직도 영세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교육·의료 등 서비스 시장의 개방에 대응하기 위한 규제개혁도 재계가 강도 높게 주문하는 분야다.

특히 영리법인의 교육·의료서비스 진출을 허용해 자본력을 앞세운 해외업체의 시장 공략에 대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재계는 주장했다.

재계는 또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인수합병)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기업들이 안심하고 경영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토지는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수도권 규제,농지 규제,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등 각종 토지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재계는 특히 과도한 농지규제로 주택건설,도시개발사업,기업의 생산시설 확장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농업개방,농업인의 고령화 등으로 노는 땅(유휴농지)은 늘어나는데 이런 땅들이 여전히 농지용도로 묶여 있어 땅값만 치솟고 이는 결국 아파트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또 경제특구 활성화를 위해 녹지 보전의 실익이 없는 그린벨트는 해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예컨대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은 전체면적 3171만평 중 그린벨트(792만평)를 포함한 녹지지역이 73%나 차지해 외국인 투자유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뛰는 기업,기는 정부

수도권의 한 철구조물 제조업체는 공장 증설을 위해 기존 공장 인근 부지 1만1600여평을 확보해 놓고 정부 눈치만 보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관리지역 세분화 작업이 지연돼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

정부는 토지를 개발이 가능한 지역(계획관리지역)과 개발이 힘든 지역(생산·보전관리지역)으로 나누는 세분화 작업을 수도권과 광역시 48개 시·군은 2005년 말까지,나머지 98개 시·군은 올해 말까지 마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05년에 완료키로 한 48개 지역 중 결정이 된 지역은 4곳에 불과하다.

투자 판단에 있어 하루가 급한 기업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셈이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정부 규제도 문제다.

물가상승 등 경제여건 변화가 제도에 반영되지 않아 중소기업이 대기업 수준의 부담을 지고 있는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예컨대 자본금 5억원 이상인 기업은 상법상 3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해야 하지만 이 기준은 1998년 이후 물가가 33.5% 상승하는 동안 한 번도 변경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상시근로자수가 50인에도 못 미치는 중소기업들의 상당수가 3인 이상 이사를 선임해야 하는 실정이다.

한편 재계는 공정위 등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전심사청구제'를 확대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사전심사청구제'는 특정사안에 대해 법률의 위반 여부를 미리 알려주는 제도다.

법규 위반의 불확실성을 사전에 제거하고, 민간 법률상담이 어려운 중소기업에 법률지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