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여자의 사랑,남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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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仁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사랑은 화려한 오해요 결혼은 참혹한 이해"란 선언은 이제 상식이 되었고,"결혼엔 부인의 결혼과 남편의 결혼,두 얼굴이 있다"고 했던 미국의 사회학자 제시 버나드의 통찰은 이제 고전이 됐다.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종교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오늘날,바로 그 사랑 때문에 우리네가 치르는 유형무형(有形無形)의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더 이상 간과해선 안 될 것 같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자=사랑의 전문가,남자=사랑의 주변인' 모델이 풍미(風靡)했다. 이 모델에선 사랑에 관한 한 여성들이 훨씬 유능한 자질을 가지고 있고 남성들은 아마추어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곧 여자들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즐기며,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일에도 익숙하고,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관심을 갖고 기분을 배려해주는 일 또한 능숙하다는 것이다.
반면 남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거나 자신의 유약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일은 남자답지 못한 만큼 가능한 한 자제하도록 훈련받아왔기에,여자들처럼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나누며 친밀한 감정을 느껴본 경험이 거의 없음은 물론,사랑 관계에 자신을 투자하기보다는 자기 발전에 보다 큰 무게 중심을 둔다는 것이다.
한데 이 모델은 여성의 경험에 더해 사랑을 정의함으로써 사랑의 가치를 폄하함은 물론 관계의 성패가 전적으로 여성의 손에 달리도록 하는 역설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후 친밀성을 경험하고 사랑을 규정하는 방식 자체에 명백한 남녀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는 '두 갈래 길 모델'이 등장했다.
이 모델 역시 성 역할 사회화 과정으로 인해 남녀 간에 다양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남성들이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깊이를 결(缺)하고 있다거나,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이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남자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남성들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이 경험하는 친밀성이나 정서적 유대를 표현한다고 본다. 실제로 남자들은 친밀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스포츠나 취미활동을 함께 즐기거나 더불어 일을 도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고,위기를 극복하거나 난제(難題)를 해결함에 도움을 주고받았을 때 강력한 친밀감을 느끼는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맥락에서 '대화'에 부여하는 의미가 남녀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곧 여자들에게 대화는 관계를 풍요롭게 하고 친밀감을 키워 가는 중요한 방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면,남자들에게 대화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남성적 존재양식은 주체적 활동(agency)이요 여성적 존재양식은 관계성의 추구(communion)에 있기에,여자는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규정하고 남자는 타인과의 분리로부터 자신을 규정한다는 사실도 새겨볼 만하다. 이에 남자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게 되고,여자들은 사랑 속에서 관계에 실패할까봐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여자의 사랑과 남자의 사랑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연인이나 부부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될 것 같다. 다음 단계는 서로의 단점을 극복하고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우는 데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 같다. 남자라면 감정표현의 미숙함이나 상대를 향한 배려의 무감각함을 반성해야 할 것이고,여자라면 '사랑의 여성화'를 경계하면서 사랑표현에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최선의 길을 찾아 나선다면,남녀 공히 일과 사랑,곧 자기 발전과 관계성의 욕구 사이에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일일 것이요,남녀 공히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의 지혜로운 실천을 도모하는 일일 것이다.
"사랑은 화려한 오해요 결혼은 참혹한 이해"란 선언은 이제 상식이 되었고,"결혼엔 부인의 결혼과 남편의 결혼,두 얼굴이 있다"고 했던 미국의 사회학자 제시 버나드의 통찰은 이제 고전이 됐다.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종교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오늘날,바로 그 사랑 때문에 우리네가 치르는 유형무형(有形無形)의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더 이상 간과해선 안 될 것 같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자=사랑의 전문가,남자=사랑의 주변인' 모델이 풍미(風靡)했다. 이 모델에선 사랑에 관한 한 여성들이 훨씬 유능한 자질을 가지고 있고 남성들은 아마추어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곧 여자들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즐기며,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일에도 익숙하고,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관심을 갖고 기분을 배려해주는 일 또한 능숙하다는 것이다.
반면 남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거나 자신의 유약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일은 남자답지 못한 만큼 가능한 한 자제하도록 훈련받아왔기에,여자들처럼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나누며 친밀한 감정을 느껴본 경험이 거의 없음은 물론,사랑 관계에 자신을 투자하기보다는 자기 발전에 보다 큰 무게 중심을 둔다는 것이다.
한데 이 모델은 여성의 경험에 더해 사랑을 정의함으로써 사랑의 가치를 폄하함은 물론 관계의 성패가 전적으로 여성의 손에 달리도록 하는 역설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후 친밀성을 경험하고 사랑을 규정하는 방식 자체에 명백한 남녀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는 '두 갈래 길 모델'이 등장했다.
이 모델 역시 성 역할 사회화 과정으로 인해 남녀 간에 다양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남성들이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깊이를 결(缺)하고 있다거나,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이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남자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남성들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이 경험하는 친밀성이나 정서적 유대를 표현한다고 본다. 실제로 남자들은 친밀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스포츠나 취미활동을 함께 즐기거나 더불어 일을 도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고,위기를 극복하거나 난제(難題)를 해결함에 도움을 주고받았을 때 강력한 친밀감을 느끼는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맥락에서 '대화'에 부여하는 의미가 남녀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곧 여자들에게 대화는 관계를 풍요롭게 하고 친밀감을 키워 가는 중요한 방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면,남자들에게 대화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남성적 존재양식은 주체적 활동(agency)이요 여성적 존재양식은 관계성의 추구(communion)에 있기에,여자는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규정하고 남자는 타인과의 분리로부터 자신을 규정한다는 사실도 새겨볼 만하다. 이에 남자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게 되고,여자들은 사랑 속에서 관계에 실패할까봐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여자의 사랑과 남자의 사랑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연인이나 부부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될 것 같다. 다음 단계는 서로의 단점을 극복하고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우는 데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 같다. 남자라면 감정표현의 미숙함이나 상대를 향한 배려의 무감각함을 반성해야 할 것이고,여자라면 '사랑의 여성화'를 경계하면서 사랑표현에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최선의 길을 찾아 나선다면,남녀 공히 일과 사랑,곧 자기 발전과 관계성의 욕구 사이에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일일 것이요,남녀 공히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의 지혜로운 실천을 도모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