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스트로브 <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002년 미 국무부 한국과장이 됐을 때 미국의 통상전문가들에게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 것이 가능할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전에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한국의 많은 공무원과 기업인들이 한·미 FTA를 매우 유익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통상전문가들은 "한국이 미국과의 FTA를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회의적인 진단을 들으면서 1998년 한국과의 투자협정 협상이 떠올랐다.

당시에도 미국의 통상관계자들은 한국이 국내 정치적 반대로 협정을 성사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정부는 의욕적으로 밀고 나갔고 미국 정부도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2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협상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끝내 한국의 스크린쿼터 같은 난관을 극복하지 못했고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었다.

이런 씁쓸한 뒷맛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해 노무현 정부가 투자협정보다 훨씬 높은 단계인 FTA를 제의해왔을 때 필자는 놀랐고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이번에도 한국정부 당국자들의 의지나 협정에 따른 양국의 경제적 이해득실 분석은 확실했지만 과연 정치적인 반대를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투자협정에 이어 FTA협상까지 실패할 경우 양국의 신뢰관계만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됐다.

역시 한국의 반대론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용기와 비전을 보여주었고 FTA협상을 성공시켰다.

아직 한·미 FTA를 위한 노력은 끝나지 않았고 최종 결실 여부도 불투명한 상태다.

미국과 한국의 의회가 FTA를 승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양측에 여러 불만들도 남아있다.

이는 한·미 FTA협상이 얼마나 중대하고 복잡한 협정이었는지,얼마나 많은 우여곡절과 상호 양보가 이뤄졌는지를 시사한다.

다만 이 시점에 한국 측이 꼭 알았으면 하는 일이 있다.

한국의 많은 FTA반대자들은 "한국은 늘 불리한 입장에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

한국은 작고 가난한 국가라서 미국처럼 크고 강한 나라와 협상할 때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없고 따라서 공평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정말 낡은 생각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은 더이상 작고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4900만 인구에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다.

한국이 중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 있지 않고 유럽에 있는 국가라면 독일 프랑스 영국에 버금가는 강한 나라로 간주되었을 것이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미국의 경제칼럼니스트인 대니얼 앨트먼은 최근 뉴욕타임스에서 "한국은 유럽연합(EU),중국,미국,일본의 뒤를 잇는 수출대국이며 세계 교역국의 끝으로부터 118개 국가들의 교역량을 모두 합친 만큼 수출한다"는 계산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한국 경제가 어떻게 반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국제교역 덕분이다.

한·미 FTA 비판자들의 또 다른 오해는 한국의 협상팀이 미국 앞에 줏대없이 대응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버려야 할 우습고 위험한 미신이다.

필자는 미국 국무부에서 일할 때 많은 한국인들을 상대해 보았다. 그들은 어느 나라 협상가들보다 현명하고 잘 준비돼 있었으며 애국적이고 결연했다.

사실 워싱턴에서 한국협상가들은 까다롭고 벅찬 상대로 정평이 나있다.

때로 한국의 협상팀은 자국의 이해를 너무 챙기려다가 상대에게 나쁜 감정을 주기도 했고 심지어 협상이 실패하기도 했다.

한국의 한·미 FTA 반대론자들은 북한문제 등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노무현 정부가 미국을 "달래기위해" FTA에서 경제적 이해를 희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역시 오류다.

물론 FTA는 양국의 경제적 관계를 두텁게 하고 민간 교류도 늘릴 것이다.

하지만 한·미 FTA가 양국의 총체적인 관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라고 보는 것은 한·미 관계의 역사적 깊이와 교류폭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정치지도자들은 경제적 이해보다 외교안보적인 문제를 더 우선시해왔다.

20세기 초반 유럽이 한 예다.

1910년께 당시 국제 교역의 수준은 경탄스러울 정도로 발전했고 각국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할 이유도,가능성도 없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후 세계1차대전이 일어났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경제교류보다 소위 '테러와의 전쟁'에 압도적인 비중을 두고 있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 지도자들이 가장 크게 생각하는 문제는 "북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중국,일본과의 관계다.

한·미 FTA가 이 같은 이슈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부분적이다.

한·미 관계도 외교안보가 역시 핵심이다.

한·미 FTA의 양국 의회 승인여부와 상관없이 양국의 외교안보문제가 잘 풀린다면 양국의 관계는 돈독해질 것이다.

한국과 미국 당국자들도 FTA의 영향력을 너무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한·미 FTA가 교역을 늘리고 양측 국민들에게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진실을 말하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양국 의회가 한·미 FTA를 승인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다.

정리=김유미 국제부 기자 warmfront@hankyung.com

◇데이비드 스트로브 교수는 미 국무부에서 한국 및 일본,독일 담당을 거쳐 2002~2004년 한국과장으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