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은 결과물일 뿐이야.우리 스스로 고객들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1등은 그 결과물로 따라오게 마련이라고.(중략) 사업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인데 본말이 전도돼 사람은 사라지고 사업만 남는 경우가 허다하지." LG필립스LCD의 권영수 사장이 지난 1월 취임 직후 임직원들에게 권한 책 '배려'의 본문 중 일부분이다.

대규모 장치산업을 영위하는 LG필립스LCD는 공급자 중심의 경영으로 위기에 빠진 후 고객가치 창출을 경영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사실 고객 경영이라는 것은 사업의 근간이다.

고객이 없으면 사업도 없다.

하지만 근대 기업들은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잊고 경영을 해왔다.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 놓으면 소비자나 고객사가 알아서 물건을 사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경영의 초점은 고객보다는 경쟁사에 맞춰져 있었다.

경쟁사와 싸워 이겨 조금 더 높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는 게 기업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는 얘기다.


최근 들어 기업들이 다시 고객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품질만 갖고는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힘들어졌다.

시장이 성숙하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는데 대부분의 기업들이 비슷한 품질의 제품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고객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둘째 시장이 세계화하면서 오랫동안 내수 시장을 독점해온 기업들도 고객 만족 없이는 시장을 빼앗기는 상황에 처했다.

소비자가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느 기업의 제품이라도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웹2.0을 비롯한 인터넷의 발달도 이 같은 상황을 앞당겼고,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시장 단일화 움직임도 고객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을 더욱 높였다.

셋째 소비자들의 욕구가 다양해졌다.

가처분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졌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도 커졌다.

웬만한 품질과 서비스로는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우리 기업들도 '고객'을 경영 전반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삼고 있다.

제품 개발 단계에서부터 고객을 참여시키는 프로슈머(프로듀서와 컨슈머의 합성어)뿐 아니라 연구개발(R&D), 생산, 마케팅 등 모든 단계에서 고객을 강조하고 있다.

조직체계와 일하는 방식, 임직원의 마인드까지 온통 '고객 중심'으로 바꾸고 있다는 얘기다.

고객가치 경영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는 회사는 LG그룹이다.

'고객가치 경영'이 구본무 LG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 버렸을 정도다.

구 회장은 올해 들어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을 일일이 만나 가면서 고객 경영의 성과를 점검하고 있다.

이에 따라 LG그룹 계열사들은 잇따라 고객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고 고객에게 초점을 맞춘 제품들을 시장에 내놓고 있다.

삼성그룹의 각 계열사들은 다양한 형태의 '소비자 밀착형' 경영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제품 개발 과정에서 시장의 트렌드와 소비자들의 욕구를 조사하고, 소비자 체험단을 운영하며 히트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올 들어서는 그룹과 각 계열사별로 모든 임직원이 누구나 자유롭게 사업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는 이른바 '웹2.0 경영'을 시작했다.

현대·기아자동차도 시장 개방으로 수입차의 시장 점유율이 점점 높아지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오직 고객 만족만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난해 3월 발족한 '오토 프로슈머'는 이 같은 현대자동차의 인식을 실천으로 옮긴 사례. 자동차를 구입하면 오토 프로슈머의 회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보유 차량에 따라 소형 준중형 중형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미니밴 등으로 나뉘어 있는 오토 프로슈머 회원들은 온라인 설문조사 등을 통해 현대차를 타면서 느꼈던 점과 현대차의 마케팅 활동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정유,석유화학 등 B2B(기업 대 기업) 사업이 그룹의 모태인 SK그룹도 글로벌화와 고객과의 접점 넓히기에 경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SK텔레콤,SK커뮤니케이션즈 등은 젊은 소비자들과의 꾸준한 소통을 통해 '쌍방향 경영'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성장했다.

4대 그룹 외에도 국내 주요 기업들은 대부분 프로슈머 모임을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고객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등 경쟁적으로 고객 중심 경영을 펼치고 있다.

이 같은 경쟁은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에게는 이익이다.

시장이 더 개방되고 기업 간 경쟁이 더 치열해질수록 그 과실을 따먹는 것은 소비자다.

소비자의 파워는 그렇게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는 것이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