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시장 '블루오션' 항해사ㆍ기관사..."우린 수출역군!…전세계 누비는 건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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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온몸으로 품는다는 게 얼마나 멋진지 아세요.
'수출 역군'이란 자부심이 큰 데다 덤으로 전 세계를 둘러볼 수도 있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선장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지난달 말 5300TEU(20피트짜리 컨테이너 5300개를 실을 수 있는 크기)급 대형 컨테이너선인 '한진로마호'에서 만난 염수경씨(21).한국해양대 해사수송과학부 3학년인 그는 지난 2월부터 이 배를 타고 아시아와 유럽,그리고 아시아와 미주를 잇는 바닷길을 헤치고 있다.
해양대 3학년이 되면 실시하는 6개월짜리 '선상 실습'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서다.
여성으로서 '배를 타겠다'고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을 터.염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진 '뱃사람'이 되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다고 한다.
염씨는 "고3 때 한 친구가 해양대에 진학하면 여행도 많이 하고 취직도 잘 된다고 해서 해양대에 입학원서를 내게 됐다"며 "해양대를 졸업한 뒤에도 다른 많은 길이 있지만 이번 승선 체험을 통해 배를 타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항해사 또는 기관사가 취업시장의 '블루 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초봉이 3600만원에 달할 정도로 봉급이 후한 데다 남성의 경우 3년만 배를 타면 군 면제 혜택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항해사 또는 기관사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한국해양대와 목포해양대는 요즘 '상한가'다.
해운업체 등에 거의 100% 취업할 수 있다는 점이 인기 비결이다.
덕분에 2개 해양대의 주요 학과 커트라인은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 수준까지 올라섰으며,매년 30여명은 서울의 '괜찮은'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로 채워질 정도가 됐다.
해양대 졸업생은 뱃사람의 '꽃'인 항해사 또는 기관사의 길을 걷게 된다.
군대로 치면 장교에 해당하는 이들은 3등 항해사(기관사)→2등 항해사(기관사)→1등 항해사(기관사)→선장(기관장) 코스를 밟으며,하사관 격인 부원들을 지휘하게 된다.
승진은 일반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3등 항해사(기관사)에서 2등이 되는 데는 1.5~2년,2등에서 1등 승진에는 2~3년,1등에서 선장 또는 기관장이 되기까지는 3.5~5년가량이 소요된다.
30대 초·중반이면 선장 또는 기관장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진해운의 경우 15년 이상 배를 탄 베테랑에게는 '수석 선장' 또는 '수석 기관장' 타이틀을 달아준다.
임금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한진해운의 경우 초봉(3등 항해사·기관사 기준)이 3600만원(세전 기준)에 달한다.
김영호 3등 항해사(24)는 "일반대에 진학한 친구들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해양대 졸업생들은 1억원을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1등 항해사(기관사)가 되면 연봉은 6000만원 수준으로 껑충 뛴다.
이용인 1등 항해사(29)는 "부모님 도움 없이 수원에 30평형대 아파트를 마련했다"며 "일반대를 나온 친구들은 잘 해야 신입사원이고 상당수는 백수"라고 말했다.
연봉이 많은 만큼 업무는 빡빡하다.
컨테이너선의 경우 6개월 정도 바닷바람을 쐰 뒤에야 2개월가량의 꿈 같은 휴가가 기다린다.
승선 기간에는 가족과 생이별을 감수해야 한다.
한 달에 한두 차례 부산항에 정박할 때 잠깐 가족을 만나는 게 전부다.
김영호 3등 항해사는 "늦은 밤 관제탑에서 홀로 배를 지킬 땐 별별 생각이 다 든다"며 "외로움을 달래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걸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근무는 4시간 일한 뒤 8시간 휴식하는 시스템이 적용된다.
이를 위해 선장과 기관장을 제외한 18명 정도의 선원이 3개 조로 나뉘어 교대근무를 한다.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셈이지만,수시로 밤낮이 바뀌는 탓에 피로도가 높은 편이다.
특히 입항 또는 출항 때는 전원 대기 상태로 돌아서 각자 맡은 일을 하게 된다.
선장과 항해사들은 주로 관제탑과 뱃머리 등에서 일하고,기관장과 기관사들은 기관실에서 엔진,발전기 등을 돌본다.
대형 컨테이너선에서의 생활은 꽤나 안락하다.
소음이나 진동이 그다지 크지 않은 데다 체력단련실 사우나실 도서실 TV실 등 다양한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이 딸린 개인 방은 웬만한 중급 호텔 수준은 된다.
최고급 식자재를 쓰는 데다 요리사 교육을 받은 조리장이 동승하기 때문에 '밥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휴식시간에 선원들끼리 모여 술판을 벌이는 건 옛말.요즘은 근무가 끝나면 방으로 돌아와 영어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이 많다.
부산항에 정박할 때마다 본사에서 공수해주는 영화 드라마 등을 즐기기도 한다.
고국 소식은 인공위성을 통해 이메일로 받아본다.
이용인 1등 항해사는 "일각에선 '배 타는 사람은 무식하다'거나 '군대보다 더 군기가 센 조직'이란 편견을 갖고 있지만 실제 구타 등 전근대적인 문화는 없다"며 "조직 기강은 상벌시스템을 통해 다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배를 타기에 적합할까.
항해사와 기관사들은 밝은 성격과 책임감을 첫손에 꼽는다.
한번 배를 타면 최소 6개월 동안 밤낮 없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만큼 '튀는' 성격의 소유자는 융화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다른 선원들과 화물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책임감과 짧은 순간 정확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판단력도 뱃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