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공장 부지를 물색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 중국을 외면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주요 기업들은 급격한 임금상승,파업증가 등 제조업 환경이 악화되고 있는 중국을 피해 동남아의 다른 국가로 투자처를 잡거나 공장을 이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단지가 아닌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중국을 봐야 할 시기가 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4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메이커인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는 약 1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조립공장을 필리핀에 건설키로 했다. 중국과 필리핀을 놓고 수개월간 진행된 타당성 조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케빈 리치 TI 부사장은 "미군의 필리핀 주둔지였던 클라크 공군기지에 조성된 '클라크 자유항특구'에 공장을 건설키로 했다"며 "필리핀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유치 노력,영어가 통하는 필리핀 인재 풀 등의 장점에 힘입어 중국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밝혔다. 필리핀 정부는 이로 인해 약 3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결정은 중국의 제조업 여건 악화로 다국적기업들이 중국 투자 사업을 재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마닐라 ATR증권 경제분석가인 누즈 로랜조는 "많은 해외기업들이 제조업 투자를 위해 중국 이외의 대안을 찾고 있다"며 "TI의 필리핀 투자는 원가절감을 위해 중국으로 간다는 말이 더이상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의 중국 기피 현상은 이미 작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기기 생산업체인 플렉스트로닉스는 프린터 공장부지로 말레이시아의 조호 지역을 선택했고,세계 최대 신발 메이커인 홍콩의 웨웬은 중국 생산 규모를 줄이는 대신 인도네시아 공장을 크게 늘리기도 했다. 일본의 의류패션업체인 유니클로 역시 공장부지로 중국과 베트남을 저울질하다가 베트남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들 기업이 중국을 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임금상승이다. 중국 노동자 임금이 최근 수 년 동안 매년 10% 안팎(최저임금 기준)씩 급등하면서 저임금 매력이 상실했다. 상하이 선전 등 중국 동부지역 주요 공업도시의 공장 근로자 임금은 방콕이나 바탐(인도네시아) 등보다 3~4배나 높은 실정이다. 게다가 중국이 노동법을 개정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이 크게 향상,간접적인 노동비용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도 글로벌기업의 탈(脫)중국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플렉스트로닉스아시아법인의 피터 탄 사장은 "중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며 "중국은 더이상 세계에서 생산원가가 가장 싼 지역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기업들은 또 투자지역의 다변화 차원에서 중국 이외의 지역을 선호하고 있다. 일본 기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 기업들은 2005년 상하이 베이징 등에서 대규모로 열린 반일(反日)시위 이후 제품 생산에서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는 중국 진출 기업을 대상으로 동남아에 공장을 하나 더 건설하자는 내용의 '차이나 플러스 원(China-Plus-One)' 캠페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본 유니클로의 경우 의류의 중국 수입 의존도를 기존 90%에서 60%로 내리기로 결정하고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와 겪고 있는 무역마찰도 글로벌 기업의 중국 발길을 막고 있다. 메이드인차이나 제품에 대한 쿼터적용,관세인상 등이 잇따르면서 수출여건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의 공장에서 한 해 약 1억8000만 켤레의 스포츠화를 생산하고 있는 웨웬의 경우 지난해 중국 공장 생산 비중을 축소하는 대신 인도네시아의 공장은 대대적인 증설에 나섰다.

이 회사의 대변인인 테리IP는 "서방국가의 중국에 대한 통상압박,중국 근로자의 상대적인 고임금 등으로 중국 생산 비중을 줄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중국 비즈니스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중국을 이제 생산단지가 아닌 세계에서 가장 잠재력이 높은 시장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국 와윅 대학의 쿠마 바타차리야 교수는 "인텔이 최근 중국 다롄에 25억달러의 반도체공장을 건설키로 한 것은 중국의 생산여건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장을 노린 것"이라며 "글로벌 기업이 중국으로 가는 유일한 이유는 이제 생산이 아닌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한우덕 기자 wood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