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 밸리에서는 요즘 에너지·환경기술이 키워드가 되고 있다. 때문에 실리콘밸리가 와트(Watt,전력의 단위)밸리로 진화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들이 나온다. 누가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지시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예측하고,준비하고,적응하는 혁신집적지(cluster)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미래 전문가들은 지금의 자원을 바탕으로 한 연구개발(resource-based R&D)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연구개발(opportunity-based R&D)을 하라고 말한다. 세상의 복잡성에 주목하는 복잡계 경제학자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조직에서든 활용(exploitation)과 탐색(exploration)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지만 탐색을 위한 전략적인 자원할당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가 밀려올 때 갑자기 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실리콘 밸리의 진화는 새로운 기회를 찾는 끊임없는 탐색활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한국 경제는 창조경제로,기업경영도 창조경영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성공적이었던 빠른 추종자 전략이 더 이상 먹히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모방에서 창조로 전환하는 게 결코 말처럼 쉽지가 않다. 지금과는 다른 자원배분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구개발이 좋은 사례다. 우리나라 정부 연구개발 예산과 기업들의 연구개발투자는 자원배분 측면에서 유사하다. 투자분야별 구성이 그렇고,응용·개발에 치중되어 있는 것 또한 크게 다를 게 없다. 정부,기업 모두 단기적 문제 해결 쪽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 여전히 추종자 전략에 적합한 구조다.

과학기술부가 기초연구를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기초연구는 미래를 위한 탐색활동의 지표다.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

그러나 늘린다고 해도 정부 연구개발예산의 25% 수준이다. 만약 국가 전체로 보아 기초연구가 25% 정도는 돼야 한다면 더 큰 변화가 필요하다. 전체 연구개발투자 중 정부 비중이 4분의 1에 불과하고 보면,극단적으로 말해 기업이 기초연구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경우 정부 연구개발예산을 죄다 기초연구로 돌려야만 가능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기초연구의 비중을 늘려야 할 이유는 많다. 당장 우리 산업의 아킬레스건이라는 부품·소재가 그렇다. 부품이 선전하고 있다고 해도 소재는 기초적이고,원천적인 연구없이는 어렵다. 융합연구 역시 기초가 필수적이다. 국내외 신진 연구자들을 대거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문제는 기존의 자원배분에 만족하는 과학기술계 내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다. 또한 밖으로는 복지 등의 예산 수요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그렇다. 이것을 어떻게 깨느냐가 관건이다.

다행인 것은 기업들도 기초연구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래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선진국 기업들에 비하면 기초연구 투자에 아직 인색하다. 자유도 주고,실패도 인정해 줘야 하는데 그런 변화도 쉽지 않다.

정부도,기업도 성장동력 찾기에 혈안이지만,그럴수록 기초에 투자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기초가 돈이 된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창조가 가능하다.

안현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