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봄소풍과 장애인 콜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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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경 <문학평론가>
지난주 금요일은 고3 아들의 소풍날이었다. 힘겨운 고3 생활에 소풍이 딱히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마는,그 전날까지 계속되었던 시험에서 벗어나 하루를 정당하게(?) 쉴 수 있는 날이었을 테니 기대가 되었을 게다. 게다가 꽃들이 만발한 5월이었다.
아이들은 학급별로 소풍 갈 장소를 정했고,거기서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자고, 그리고 김밥을 싸가는 대신 너른 공원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자고 기대와 호기 섞인 이야기도 주고받은 모양이었다.
문제는 1급 지체장애를 가진 반 친구의 소풍 참가 방법이었다. 소풍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나 야외 활동이 부담스러웠던지 처음에 그 아이는 소풍날 하루 쉬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훗날 졸업 앨범에서 그 친구가 빠진 소풍 사진을 봐야 한다는 게 영 마음에 걸리셨던지 선생님은 가능하면 반 친구 모두 참석하도록 하자고 했고,결국 다른 친구 두 명이 그 아이를 도와 소풍 장소로 함께 오기로 했다.
그런데 휠체어를 밀며 걷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두 친구는 두 시간가량을 번갈아 휠체어를 밀어야 했고,그 덕에 소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 아이들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소풍날 반 친구 모두 함께하기'라는 일면 당연해 보이는 일은 그토록 힘겹고 대단한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더 큰 문제는 소풍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려 할 때 일어났다. 다시 두 친구가 그 장애인 친구의 휠체어를 밀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 선생님과 아이들은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전화를 하니 그쪽에서는 장애인 카드가 있어야만 그 차를 이용할 수 있다고 했고,그 아이는 하필 그날 장애인 카드를 집에 두고 온 터라 차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선생님은 다시 그쪽에 전화를 걸어서 이 아이는 장애가 심한 아이이니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그리고 아이 집에 도착해서 장애인 카드를 보여주겠다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규정상 그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선생님은 구청으로,장애인 담당부서로,그리고 서울시 산하 장애인불편신고센터로 다시 전화를 했고,그러던 중에 장애인 콜택시 측으로부터 이번만 특별히 봐 줄 테니 집에 가서 꼭 장애인 카드를 보여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콜택시를 탈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또 한 시간 반이나 지나서였으니,서울 사람이면 누구나 알 만한 길로 설명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던 운전사는 한 시간도 넘게 다른 곳을 헤매다 나타났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친구 집에 도착했을 때 막상 그 운전사는 장애인 카드를 보자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소풍에서 돌아온 아이는 이런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흥분했고,아이들과 선생님의 그 당시 심정을 생각하니 나 역시 화가 났다.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임을 증명하는 카드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외관으로도 쉽게 장애인임이 식별되는 사람에게 장애인이라는 증명 서류를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그리고 그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장애인 차를 탈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일일까. 돈이 없어도 집에 가서 주기로 하고 차를 타기도 하거늘,집에 가서 장애인 카드를 보여주겠다고 하는데도 장애인 차를 이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사람이 먼저인가, 서류가 먼저인가. 규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가,사람이 규정을 위해 있는 것인가.
언젠가 심한 장애를 갖고 있는 조카와 택시를 타려고 했다가 이곳은 택시 타는 곳이 아니니 택시 타는 곳으로 가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거니와,장애인을 상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토록 규정을 잘 지키는 모범 시민이 되는 것인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이날 아이는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장애인을 위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실감했다며 쓸쓸해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그날 교단일기에 "오늘 하루 아이들의 따뜻한 우정을 보아서 기뻤고,장애인들의 애로를 몸소 체험하게 되어서 슬펐다"고 적었다. 나도 아이가 그날 그런 경험을 한 것이 기쁘고 또 슬프다.
지난주 금요일은 고3 아들의 소풍날이었다. 힘겨운 고3 생활에 소풍이 딱히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마는,그 전날까지 계속되었던 시험에서 벗어나 하루를 정당하게(?) 쉴 수 있는 날이었을 테니 기대가 되었을 게다. 게다가 꽃들이 만발한 5월이었다.
아이들은 학급별로 소풍 갈 장소를 정했고,거기서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자고, 그리고 김밥을 싸가는 대신 너른 공원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자고 기대와 호기 섞인 이야기도 주고받은 모양이었다.
문제는 1급 지체장애를 가진 반 친구의 소풍 참가 방법이었다. 소풍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나 야외 활동이 부담스러웠던지 처음에 그 아이는 소풍날 하루 쉬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훗날 졸업 앨범에서 그 친구가 빠진 소풍 사진을 봐야 한다는 게 영 마음에 걸리셨던지 선생님은 가능하면 반 친구 모두 참석하도록 하자고 했고,결국 다른 친구 두 명이 그 아이를 도와 소풍 장소로 함께 오기로 했다.
그런데 휠체어를 밀며 걷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두 친구는 두 시간가량을 번갈아 휠체어를 밀어야 했고,그 덕에 소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 아이들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소풍날 반 친구 모두 함께하기'라는 일면 당연해 보이는 일은 그토록 힘겹고 대단한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더 큰 문제는 소풍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려 할 때 일어났다. 다시 두 친구가 그 장애인 친구의 휠체어를 밀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 선생님과 아이들은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전화를 하니 그쪽에서는 장애인 카드가 있어야만 그 차를 이용할 수 있다고 했고,그 아이는 하필 그날 장애인 카드를 집에 두고 온 터라 차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선생님은 다시 그쪽에 전화를 걸어서 이 아이는 장애가 심한 아이이니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그리고 아이 집에 도착해서 장애인 카드를 보여주겠다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규정상 그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선생님은 구청으로,장애인 담당부서로,그리고 서울시 산하 장애인불편신고센터로 다시 전화를 했고,그러던 중에 장애인 콜택시 측으로부터 이번만 특별히 봐 줄 테니 집에 가서 꼭 장애인 카드를 보여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콜택시를 탈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또 한 시간 반이나 지나서였으니,서울 사람이면 누구나 알 만한 길로 설명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던 운전사는 한 시간도 넘게 다른 곳을 헤매다 나타났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친구 집에 도착했을 때 막상 그 운전사는 장애인 카드를 보자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소풍에서 돌아온 아이는 이런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흥분했고,아이들과 선생님의 그 당시 심정을 생각하니 나 역시 화가 났다.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임을 증명하는 카드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외관으로도 쉽게 장애인임이 식별되는 사람에게 장애인이라는 증명 서류를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그리고 그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장애인 차를 탈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일일까. 돈이 없어도 집에 가서 주기로 하고 차를 타기도 하거늘,집에 가서 장애인 카드를 보여주겠다고 하는데도 장애인 차를 이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사람이 먼저인가, 서류가 먼저인가. 규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가,사람이 규정을 위해 있는 것인가.
언젠가 심한 장애를 갖고 있는 조카와 택시를 타려고 했다가 이곳은 택시 타는 곳이 아니니 택시 타는 곳으로 가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거니와,장애인을 상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토록 규정을 잘 지키는 모범 시민이 되는 것인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이날 아이는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장애인을 위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실감했다며 쓸쓸해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그날 교단일기에 "오늘 하루 아이들의 따뜻한 우정을 보아서 기뻤고,장애인들의 애로를 몸소 체험하게 되어서 슬펐다"고 적었다. 나도 아이가 그날 그런 경험을 한 것이 기쁘고 또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