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까지 화폭에 매달린 삶 "우리는 영원한 현역… 자유를 붓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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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90세까지 화폭에 매달린 삶은 어떤 것일까.
이성자 화백(갤러리 현대·23일~6월10일)과 장두건 화백(서울갤러리·15~27일)이 나란히 졸수(卒壽)전을 연다.
이들은 한국 서양화 1세대로 1950년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남관 이응로 함대정 김환기 화백 등과 함께 활동한 원로 중의 원로.이 화백은 지금까지 프랑스에 머물고 있고 장 화백은 한국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창작혼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동서양의 미학을 화폭에 접목시켰던 이들 노화가는 '창작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인생은 영원한 자유를 붓질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전남 광양 출신의 이 화백은 한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채 1935년 도쿄 짓센여대에서 유학하고 와서 외과의사의 아내로 살다가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화업을 시작했다.
그는 고국에 두고 온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듯,옷을 입히듯 무수한 직선을 칠하고 긁어내고 덧칠해 동양적인 향취를 담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땅을 잘 가꾸어야 좋은 나무가 올라오듯 그렇게 그림을 그렸어요.
내 작업은 아이들에게 음식을 주고 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림이 완성되면 그것은 우리의 아이들이 되는 것이니까요."
이씨는 네모 세모 원 등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환희에 찬 삶'을 끊임없이 그려낸다.
요즘도 프랑스 파리 남쪽의 투레트 작업실에서 하루 4~5시간씩 작업에 매달린다.
이번 고국 전시의 주제를 '우주의 노래'로 붙인 것도 관람객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갤러리 현대 전관에 50여점을 거는 이번 전시에 맞춰 화집 '이성자,예술과 삶'(생각의 나무)도 출간했다.
전시를 위해 16년 만에 고국을 찾은 이 화백은 "70여년에 걸친 화업은 자폐적인 미학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조화로운 세계로의 도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에 비해 장 화백은 70여년의 화업을 '정성의 산물'로 규정한다.
"나에게 그림은 우연의 미학이라기보다 마치 석공이 돌을 쪼듯 아름다움을 새기는 작업입니다.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다다보니 화력은 70년이지만 작품 수는 300여점 정도로 적은 편입니다."
포항에서 태어난 장 화백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거쳐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 파리 그랑 쇼미에르 미술학원과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에는 세종대와 성신여대 등에서 후학을 길러냈다.
그는 요즘도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작업실로 매일 오전 10시에 출근,하루 10시간 정도 작업을 한다.
비록 기력은 없지만 작업실에 앉아있을 때 행복과 자유를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서울사대부중 은사이기도 한 장 화백은 "1990년대 말 위암과 직장암을 극복하면서 '영원한 현역'으로 남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했다"며 "내 작품 세계와 그 가치를 지키는 것은 오직 나이며 내 작품을 찾는 이가 없어 안팔린다면 그 역시 숙명"이라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이성자 화백(갤러리 현대·23일~6월10일)과 장두건 화백(서울갤러리·15~27일)이 나란히 졸수(卒壽)전을 연다.
이들은 한국 서양화 1세대로 1950년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남관 이응로 함대정 김환기 화백 등과 함께 활동한 원로 중의 원로.이 화백은 지금까지 프랑스에 머물고 있고 장 화백은 한국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창작혼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동서양의 미학을 화폭에 접목시켰던 이들 노화가는 '창작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인생은 영원한 자유를 붓질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전남 광양 출신의 이 화백은 한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채 1935년 도쿄 짓센여대에서 유학하고 와서 외과의사의 아내로 살다가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화업을 시작했다.
그는 고국에 두고 온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듯,옷을 입히듯 무수한 직선을 칠하고 긁어내고 덧칠해 동양적인 향취를 담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땅을 잘 가꾸어야 좋은 나무가 올라오듯 그렇게 그림을 그렸어요.
내 작업은 아이들에게 음식을 주고 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림이 완성되면 그것은 우리의 아이들이 되는 것이니까요."
이씨는 네모 세모 원 등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환희에 찬 삶'을 끊임없이 그려낸다.
요즘도 프랑스 파리 남쪽의 투레트 작업실에서 하루 4~5시간씩 작업에 매달린다.
이번 고국 전시의 주제를 '우주의 노래'로 붙인 것도 관람객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갤러리 현대 전관에 50여점을 거는 이번 전시에 맞춰 화집 '이성자,예술과 삶'(생각의 나무)도 출간했다.
전시를 위해 16년 만에 고국을 찾은 이 화백은 "70여년에 걸친 화업은 자폐적인 미학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조화로운 세계로의 도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에 비해 장 화백은 70여년의 화업을 '정성의 산물'로 규정한다.
"나에게 그림은 우연의 미학이라기보다 마치 석공이 돌을 쪼듯 아름다움을 새기는 작업입니다.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다다보니 화력은 70년이지만 작품 수는 300여점 정도로 적은 편입니다."
포항에서 태어난 장 화백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거쳐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 파리 그랑 쇼미에르 미술학원과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에는 세종대와 성신여대 등에서 후학을 길러냈다.
그는 요즘도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작업실로 매일 오전 10시에 출근,하루 10시간 정도 작업을 한다.
비록 기력은 없지만 작업실에 앉아있을 때 행복과 자유를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서울사대부중 은사이기도 한 장 화백은 "1990년대 말 위암과 직장암을 극복하면서 '영원한 현역'으로 남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했다"며 "내 작품 세계와 그 가치를 지키는 것은 오직 나이며 내 작품을 찾는 이가 없어 안팔린다면 그 역시 숙명"이라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