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孝鍾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최근 한국사회에는 우리가 직면한 난제들을 '사회협약'의 형태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진보와 보수,20 대 80,경제 양극화 현상,노사문제,교육 3불(不)정책,지역주의 문제 등에서 불거진 갈등현상을 해결하려면 사회협약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이명현 교육선진화운동본부 대표는 교육의 3불정책을 둘러싼 갈등을 끝내기 위해 정부 대학 등 관련주체들이 자발적인 역할수행을 국민 앞에 약속하는 '대사회 협약'을 맺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교육문제 이외에도 사회협약의 방식은 노무현정부 들어와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으며,투명성협약이나 매니페스토협약 등 이뤄진 것들도 꽤 있다.

물론 사회협약의 방식이 '아일랜드 모델'이니 하며,서구 일부사회에서 효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이른바 '사회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신뢰'가 사회에 충만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는 '저신뢰의 사회'다.

겉으로는 천냥빚을 갚을 듯이 떠들썩한 '말잔치'를 벌이지만,속으로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을 방불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불신과 무질서가 팽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대타협'이나 '사회협약'을 아무리 맺어본들,이름만 그럴 듯할 뿐 내용은 별로 없는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가 김대중 정부 시절 등장한 노사정위원회다.

외환위기를 맞아 노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큰 기대를 안고 출범한 노사정위원회는 정리해고문제 등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만 합의가 이뤄졌을 뿐,그 이후에는 줄곧 파국을 면할 수 없었다.

특히 민노총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마다 '고통분담'이 아니라 '고통전담'이라며 탈퇴와 불출석의 행태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합의'보다 '참석'이 더 큰 이슈가 되는 등 배보다 배꼽이 더 커 보이는 당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합의와 타협의 정신만 강조하다 보면 당사자들에게 요령이나 위협적 태도 등 전략적인 모습을 부추기게 된다.

사람들은 약자의 위치에 있건,아니면 강자의 위치에 있건,자신의 최소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방어적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압박함으로써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공세적으로' 임하는 경우도 많다.

공세적 태도도 방어적이라고 주장할 때는 제3자가 가늠할 능력이 없다.

당연히 협약을 무시하는 태도가 나타나게 마련인데,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된다.

이것은 결국 사회협약이 통합보다는 분열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짙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갈등의 문제는 사회협약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법치(法治)가 실종된 무질서 상황에서 기인하는 문제다.

특히 협약이라고 할 때는 원칙을 넘어서서 초법이나 불법에 해당될 만큼 무리한 사항으로 타협을 하게 될 가능성도 크다.

법치의 뒷받침없이 협약만을 내세울 때,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찍이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필레 전투를 앞두고 스파르타 사람 테마라토스에게 어떻게 똑같이 자유로운 인간들이 모여 일사불란한 질서를 이루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테마라토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스인들은 물론 자유스럽지만,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법이라는 왕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법을 두려워하는 정도는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합니다."

이 말은 21세기 한국사회가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법치는 흔히 강제에 입각한 공권력의 개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법이란 시민들 간의 개별적인 약속에 다름 아니며,그러한 의미에서 협약보다 선행한다.

법이 개별적 약속이라면,협약은 집단상호 간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협약도 지켜질 수 없다.

따라서 노사문제 등 시급한 현안에 대해 협약이나 타협보다 법과 원칙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