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기업 최고의 가치임은 분명하지만 생존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IBM이 간판인 PC사업을 접고, 유럽 최고의 전자회사인 필립스가 헬스케어를 제외한 사업을 정리하겠다고 나선 것도 바로 생존을 위해서였다.

몸집을 줄여 초라하게 살아남는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한 새로운 기회는 언제든 찾아온다는 게 기업인들의 신념이다.

한때 반도체와 TV를 앞세워 삼성 LG와 경쟁을 벌였던 아남전자도 새로운 생존법을 터득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든 1000억원의 연간 매출에 벤처기업과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으며 '알짜기업'의 꿈을 키워가는 중이다.

외환위기 이전 아남전자는 '잘나가는 기업'에 속했다.

1974년 국내 최초로 컬러TV를 생산한 기술력 덕분에 '아남 TV=고급 TV'라는 등식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고 반도체 사업 또한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중점 육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9년 시작된 법정관리가 시련의 시작이었다.

그룹의 모태인 반도체 사업은 동부그룹과 미국 엠코테크놀로지에 넘어갔고, 2004년에는 애지중지하던 TV사업마저 접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그랬던 아남전자가 지난해 연간 영업실적을 흑자로 돌린 데 이어 올 1분기에도 흑자(영업이익 5억3500만원)를 이어가는 데 성공했다.

1분기 매출도 1년 전에 비해 31.4% 늘어난 251억원을 기록했다.

3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전성기 때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지난 몇년간의 아픔을 생각하면 소중한 실적이다.

아남전자 관계자는 "계절적으로 비수기인 1분기에 흑자를 냈다는 건 안정적인 흑자구조를 갖췄다는 걸 뜻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아남전자가 지겨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선택과 집중' 전략이 적중했기 때문.매출의 절반(43.5%)을 차지했지만 수익성을 갉아먹던 TV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오디오와 셋톱박스 사업에 역량을 집중한 결과다.

특히 오디오 기술은 꾸준한 투자에 힘입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갔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140여명의 안산 본사 인력 중 80여명이 엔지니어일 정도다.

마란츠 데논 하만카드 등 세계적인 오디오 업체들에 리시버와 DVD플레이어 등을 제조자 설계생산(ODM) 방식으로 납품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최근 원청업체가 5∼6개 더 늘어나 매출도 크게 신장하고 있고 무엇보다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좋은 가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휴맥스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납품하는 셋톱박스 사업도 정상궤도에 올랐다.

한때 잘나갔던 기업의 자존심이나 명예는 잊어버렸다.

중국 법인에서 만드는 셋톱박스가 돈을 벌면서 지분법 평가이익이 발생,경상이익이 영업이익보다 큰 실적 구조도 갖췄다.

아남전자가 꿈꾸는 미래상은 '멀티미디어 기기 수출 전문업체'다.

10년 전의 명성을 되찾기까지는 아직 갈길이 멀지만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게 자체 판단이다.

당장은 자체 브랜드를 육성할 여력이 없지만,어느날 아이팟 나노 하나로 벌떡 일어선 애플처럼 드라마틱한 성장사를 다시 쓸 날이 올 것으로 믿고 있다.

아남전자는 현재 전자부품업체인 아남인스트루먼트가 최대주주이며,아남인스트루먼트는 창업자인 고(故) 김향수 명예회장의 차남 김주채 회장이 최대주주다.

장남인 김주진 회장은 미국 엠코테크놀로지를 이끌고 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