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미래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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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盈敎 < 동국대 총장 youngfive@dongguk.edu >
흔히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5월에 있고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날도 5월 한가운데 있다.
마침 오늘은 스승의 날이어서 그 직책과 사회적 기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김홍도의 민속화를 보면 서당의 모습이 재미있게 표현돼 있다.
훈장님으로부터 회초리를 맞으며 꾸지람을 듣는 학동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 시절의 스승은 군사부일체라는 도덕적 신성성의 굳건한 영향 속에 있었다.
나랏님과 아버지와 선생님이 모두 하나같이 존귀하다는 도덕률은 곧 조선 사회를 지탱했던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교육이었다는 증언이다.
스승이 이와 같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존귀할진대 스승을 둘러싼 추문이나 쑥덕공론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 스승의 날은 촌지와 선물로 골머리를 앓기 일쑤인 모양이다.
교장 선생님의 재량으로 아예 쉬는 학교도 많다고 들었다.
수년 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다는데도 그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이 모든 배경에는 스승을 도덕적 표상이 아닌 기능적 표상으로 보는 관점이 숨어 있다.
즉 교사는 절대 신성의 주체가 아니라 가르치는 기능인이라는 인식이 어느 새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식과 정보를 잘 가르쳐 주기만 하면 교수나 교사의 자본 거래 가치가 더욱 높아지게 된다.
프로 선수처럼 재화에 의해 등급이 결정되는 것이다.
일부 대학이 벌써 이렇게 하고 있고 사교육 시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원칙이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가르치는 기능인의 미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어떤 호기심 많은 소설가가 마녀의 수정 구슬을 통해 이들의 미래를 훔쳐보았다.
오래된 노트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강의하던 교수는 프로페서 대신에 인터프리터(번역가)라는 주홍 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진다.
그는 더 이상 모든 학생들에게 새로운 창의력을 계발시켜 주지 못한 채 지나간 이론만으로 시간을 중얼거리며 강의실 안을 불안하게 날아다니는 앵무새일 뿐이다.
특정 학문 분야의 진정한 교수는 극소수만 생존한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압도적인 창의력으로 전 세계의 교육 시장을 석권한다.
교사도 예외가 아니다.
주입식으로 전달하는 지식은 이미 구글 속에 다 있으므로 자칫하다간 실업자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교수나 교사들은 이제 프로페서나 티처의 이름 대신 인스트럭터(안내자)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클래스에 있는 15명의 학생들에게 한 가지 답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15개의 답이 나오도록 안내해 주는 교육을 연수를 통해 새로 받았기 때문이다.
이 미래 그림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 교육의 미래는 개개인의 창의를 길러 주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하는 안내자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이다.
흔히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5월에 있고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날도 5월 한가운데 있다.
마침 오늘은 스승의 날이어서 그 직책과 사회적 기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김홍도의 민속화를 보면 서당의 모습이 재미있게 표현돼 있다.
훈장님으로부터 회초리를 맞으며 꾸지람을 듣는 학동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 시절의 스승은 군사부일체라는 도덕적 신성성의 굳건한 영향 속에 있었다.
나랏님과 아버지와 선생님이 모두 하나같이 존귀하다는 도덕률은 곧 조선 사회를 지탱했던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교육이었다는 증언이다.
스승이 이와 같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존귀할진대 스승을 둘러싼 추문이나 쑥덕공론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 스승의 날은 촌지와 선물로 골머리를 앓기 일쑤인 모양이다.
교장 선생님의 재량으로 아예 쉬는 학교도 많다고 들었다.
수년 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다는데도 그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이 모든 배경에는 스승을 도덕적 표상이 아닌 기능적 표상으로 보는 관점이 숨어 있다.
즉 교사는 절대 신성의 주체가 아니라 가르치는 기능인이라는 인식이 어느 새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식과 정보를 잘 가르쳐 주기만 하면 교수나 교사의 자본 거래 가치가 더욱 높아지게 된다.
프로 선수처럼 재화에 의해 등급이 결정되는 것이다.
일부 대학이 벌써 이렇게 하고 있고 사교육 시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원칙이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가르치는 기능인의 미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어떤 호기심 많은 소설가가 마녀의 수정 구슬을 통해 이들의 미래를 훔쳐보았다.
오래된 노트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강의하던 교수는 프로페서 대신에 인터프리터(번역가)라는 주홍 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진다.
그는 더 이상 모든 학생들에게 새로운 창의력을 계발시켜 주지 못한 채 지나간 이론만으로 시간을 중얼거리며 강의실 안을 불안하게 날아다니는 앵무새일 뿐이다.
특정 학문 분야의 진정한 교수는 극소수만 생존한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압도적인 창의력으로 전 세계의 교육 시장을 석권한다.
교사도 예외가 아니다.
주입식으로 전달하는 지식은 이미 구글 속에 다 있으므로 자칫하다간 실업자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교수나 교사들은 이제 프로페서나 티처의 이름 대신 인스트럭터(안내자)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클래스에 있는 15명의 학생들에게 한 가지 답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15개의 답이 나오도록 안내해 주는 교육을 연수를 통해 새로 받았기 때문이다.
이 미래 그림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 교육의 미래는 개개인의 창의를 길러 주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하는 안내자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