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늦가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A사의 오너 경영자가 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모 상장사가 우리 회사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기업의 오너와는 10여년간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이게 상도의에 맞는 거냐"고도 했다. A사는 납품관계에 있는 기업 등이 백기사로 나서면서 가까스로 적대적 M&A위기를 넘겼다.

최근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굉장한 주식'이라고 치켜세운 포스코도 아르셀로-미탈의 적대적 M&A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버핏은 벅셔 해서웨이 주총에서 "보유 주식 일부를 처분해 대형 기업 인수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포스코가 아니란 보장이 있을까. 포스코는 동국제강,현대중공업 등과 지분을 맞교환하면서 방어벽을 높게 쌓아가고 있기는 하다.

국회에선 또 포스코처럼 기간산업을 영위하는 업체가 외국 자본에 쉽게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법(한국판 '엑슨-플로리오법')을 입안 중이다.

M&A가 한국기업의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기자가 만난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M&A계획을 밝히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다. M&A위협을 받고 있는 포스코도 대우조선해양 등을 저울질할 땐 영락없는 '포식자'의 모습이다. 이웅열 코오롱 회장은 창립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46개 회사를 M&A리스트에 올려놓고 저울질하고 있다"며 대상회 사의 숫자까지 공개하기도 했다.

국내 기업들에 M&A는 꼭 건너야만 하는 다리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한국기업은 현재 두툼한 돼지저금통을 몇 개씩 꿰차고 있지만,다른 한편으론 수익원이 점점 줄어드는 비대칭국면에 처해있다.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는 기업이 매년 늘어 작년 말 현재 유가증권시장에선 강원랜드 남양유업 제일기획 등 79개사,코스닥시장에선 파라다이스 GS홈쇼핑 NHN 등 154개사가 무차입 상태다.

이들 기업은 기업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은행대출,사채발행 등이 아닌 주식발행 또는 내부유보금으로 조달하고 있다. 반면 영업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력은 급락하고 있다. 금융사를 뺀 상장사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2004년 9.8%에서 작년 6.6%로 급락했다. 대표기업 삼성전자는 21%에서 12%로 반토막이 났다.

M&A전선에 뛰어드는 이유는 자명하다. 규모를 키워 외풍을 막고,신성장 엔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경제규모가 크고 시장이 성숙한 선진국에선 흔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브랜드파워 1위 기업 구글이 작년 10월 설립된 지 갓 1년밖에 안된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16억5000만달러에 사들인 것도 잘 나갈 때 차기작을 준비하겠다는 포석일 터다.

M&A는 약육강식의 기업생태계를 움직이는 작동원리일 수 있다. 두산,금호,STX 등이 M&A를 통해 재계 순위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두산은 잘나가던 맥주산업을 떼어내는 아픔을 감내한 끝에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과 대우종합기계(두산인프라코어)를 얻어 승승장구하고 있다. M&A는 일종의 분해 조립게임이다. 자신을 팔아치울 자신이 있는 조직만이 더 탐나는 먹잇감을 챙길 수 있다. 그 첫걸음은 투명한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닐까.

남궁 덕 산업부 차장 nkd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