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바뀌긴 바뀌는 모양이다.

무능 공무원 퇴출제와 동사무소 통폐합이 시작되더니 관행이란 이름으로 지겹게 계속돼온 지자체 행사의 '내빈 축사'도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울산시 울주군과 남구청이 체육대회나 축제 때 축사와 격려사 등 소위 '높은 분'들의 '한 말씀' 생략에 나섰다는 것이다.

울주군은 지난달 열린 한 체육대회 때 아예 개회식 자체를 없애고 행사 진행 안내만 했다고 한다.

"오늘은 또 몇 명이 나와 지루한 얘기를 늘어놓을까" 긴장했던 선수와 관객이 얼마나 좋아했을지 눈에 선하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이 있지만 관(官)자 붙은 곳의 행사는 특히 더하다.

구청 시상식만 해도 구청장,구의회 의장,시장,시의회 의장,국회의원까지 한 마디 하느라 30분 이상 허비하는 일이 다반사다.

지자체의 각종 축제나 대회 때면 이들의 장광설에 참석자들의 기운은 다 빠지기 일쑤다.

지쳐 웅성거려도 소용없다.

내빈 소개나 축사를 소홀히 하거나 순서를 잘못 정했다 혼났다는 얘기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일부의 변화에도 불구,많은 곳에서 "어떻게 축사를 없애나" 걱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산영화제는 첫회(1996년)부터 단 한사람의 인사말과 축사도 허용하지 않았다.

개막식이래야 조직위원장의 개막선언,축하공연,집행위원장의 심사위원 및 개막작 감독과 주연배우 소개가 전부다.

어떤 정치색도 배제한 순수 영화잔치로 꾸린다는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방침에 따라 영화인 외엔 아무도 개막식 무대에 서지 못한다. 내빈 자리 또한 객석에 마련된다.

정치인들이 단상에 오르지 못해 화를 냈다는 것도 옛말,지금은 으레 그런 줄 안다.

아시아 최고 영화제가 그냥 된 게 아닌 셈이다.

'꿀벌과 게릴라'를 쓴 게리 해멀은 "20세기가 단속적 평형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캄브리아기(생물이 급증한 시기)같은 혁명의 시대다.

게임의 룰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계에서 시도된 지 12년 만에 행정가에 부는 바람이 모쪼록 우리 사회 전반의 권위주의적 관행을 깨는 티핑포인트가 되기를 기대한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