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한국의 어머니는 '만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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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예 < 소설가 >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지 못한다.
아니 유원지에 있는,이름을 알 수 없는 놀이기구를 거의 타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겁이 많은 탓도 있지만,언제부턴가 위험한 상상이 나를 심리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즐거운 비명도 나를 유혹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 상상 속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유원지에서도 아니고 놀이기구에서도 아니다.
그것은 엄연히 학교의 행사장에서 일어난 일이고,체험안전교육을 실시하던 소방 굴절차에서 일어난 일이다.
인명구조를 위한 바구니에서 떨어져 인명이 피해를 당한 이 아이로니컬한 사건에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학교운동장에서 벌어진 이 참사의 희생자들은 어머니들이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 대신에 어머니들이 희생된 게 마치 불행 중 다행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어머니의 희생이란 우리들의 머릿속에 오래 전부터 각인된 이데올로기인지도 모른다.
보통 어머니의 희생은 자식의 성공과 부귀영화로 인해 빛이 나게 마련이다.
어둠속의 달은 스스로 빛나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허망한 희생이 어디 있을까 싶다.
나는 유원지에 가서 절대 놀이기구를 타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이 학교라면,그리고 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잠시 눈 질끈 감고 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것이 대한민국 어머니고 겁 많은 여자를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학교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학교의 입장은 좀 다르겠지만,가끔 '대한민국 어머니는 봉인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학교의 행사가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지만,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이라도 하면 교통지도부터 학교청소나 급식당번에서 어머니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서양의 학교라면 정부의 교육인적 요원들이 투여돼 할 수 있는 일을 어머니가 대신하는 일이 많으니 말이다.
그것은 교육예산 부족,우리나라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나 희생정신,학교라는 공권력(公權力)이 빚은 현상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아이들과 어머니들은 안전교육을 물론 재미있는 체험 이벤트로 기억할 수도 있겠다.
생긴 것도 놀이기구 비슷하게 생긴 굴절차 바구니는 얼마나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인가.
그런데 그 안에,명색이 인명구조 시설인 소방차에,안전 고리도 안전벨트도 없었다니.작은 유원지의 우스운 놀이기구에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되어 있다.
하다못해 운동장에 에어매트라도 깔아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작은 서커스단의 외줄타기 선수 밑에도 매트는 깔아놓는다.
바구니에 들어간 사람은 안전요원도 아니고,소방대원도 아니고 선의(善意)를 가진 무고한 어머니들과 아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대담한 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희생자가 나와야 정신을 좀 차리는 인명경시의 지독한 중독증에 걸린 것 같다.
어떤 경우든 아이들과 어머니는 유사시(有事時)에 가장 먼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만,가장 먼저 희생자가 되기도 하는 존재다.
즐거운 체험교육이 되었을 수도 있는 그 참사의 희생자는 사고를 당한 어머니들뿐이겠는가.
아니다.
그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린 자식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할 악몽이 되는 건 아닐까.
안전과민증 환자가 되는 건 아닐까.
내 아이가 세 돌 무렵 우리는 아파트 2층에 살았다.
어느 여름날,아이와 베란다에서 놀고 있던 중 꼭대기 층에서 이사를 하던 사다리차에서 인부가 떨어져 우리집 베란다 밑 화단에서 숨진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바로 코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그 장면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아 나는 괴로웠다.
아이 또한 몹시 앓았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깊은 연민 때문일까.
나는 아이들 대신 죽음의 순간을 맞아 두려웠을 희생자 어머니들,그것을 지켜보았던 아이들,그리고 유족들의 슬픔과 아픔을 마음으로 깊이 위로해 드리고 싶다.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지 못한다.
아니 유원지에 있는,이름을 알 수 없는 놀이기구를 거의 타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겁이 많은 탓도 있지만,언제부턴가 위험한 상상이 나를 심리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즐거운 비명도 나를 유혹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 상상 속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유원지에서도 아니고 놀이기구에서도 아니다.
그것은 엄연히 학교의 행사장에서 일어난 일이고,체험안전교육을 실시하던 소방 굴절차에서 일어난 일이다.
인명구조를 위한 바구니에서 떨어져 인명이 피해를 당한 이 아이로니컬한 사건에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학교운동장에서 벌어진 이 참사의 희생자들은 어머니들이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 대신에 어머니들이 희생된 게 마치 불행 중 다행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어머니의 희생이란 우리들의 머릿속에 오래 전부터 각인된 이데올로기인지도 모른다.
보통 어머니의 희생은 자식의 성공과 부귀영화로 인해 빛이 나게 마련이다.
어둠속의 달은 스스로 빛나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허망한 희생이 어디 있을까 싶다.
나는 유원지에 가서 절대 놀이기구를 타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이 학교라면,그리고 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잠시 눈 질끈 감고 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것이 대한민국 어머니고 겁 많은 여자를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학교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학교의 입장은 좀 다르겠지만,가끔 '대한민국 어머니는 봉인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학교의 행사가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지만,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이라도 하면 교통지도부터 학교청소나 급식당번에서 어머니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서양의 학교라면 정부의 교육인적 요원들이 투여돼 할 수 있는 일을 어머니가 대신하는 일이 많으니 말이다.
그것은 교육예산 부족,우리나라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나 희생정신,학교라는 공권력(公權力)이 빚은 현상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아이들과 어머니들은 안전교육을 물론 재미있는 체험 이벤트로 기억할 수도 있겠다.
생긴 것도 놀이기구 비슷하게 생긴 굴절차 바구니는 얼마나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인가.
그런데 그 안에,명색이 인명구조 시설인 소방차에,안전 고리도 안전벨트도 없었다니.작은 유원지의 우스운 놀이기구에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되어 있다.
하다못해 운동장에 에어매트라도 깔아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작은 서커스단의 외줄타기 선수 밑에도 매트는 깔아놓는다.
바구니에 들어간 사람은 안전요원도 아니고,소방대원도 아니고 선의(善意)를 가진 무고한 어머니들과 아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대담한 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희생자가 나와야 정신을 좀 차리는 인명경시의 지독한 중독증에 걸린 것 같다.
어떤 경우든 아이들과 어머니는 유사시(有事時)에 가장 먼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만,가장 먼저 희생자가 되기도 하는 존재다.
즐거운 체험교육이 되었을 수도 있는 그 참사의 희생자는 사고를 당한 어머니들뿐이겠는가.
아니다.
그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린 자식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할 악몽이 되는 건 아닐까.
안전과민증 환자가 되는 건 아닐까.
내 아이가 세 돌 무렵 우리는 아파트 2층에 살았다.
어느 여름날,아이와 베란다에서 놀고 있던 중 꼭대기 층에서 이사를 하던 사다리차에서 인부가 떨어져 우리집 베란다 밑 화단에서 숨진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바로 코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그 장면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아 나는 괴로웠다.
아이 또한 몹시 앓았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깊은 연민 때문일까.
나는 아이들 대신 죽음의 순간을 맞아 두려웠을 희생자 어머니들,그것을 지켜보았던 아이들,그리고 유족들의 슬픔과 아픔을 마음으로 깊이 위로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