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를 생각하면 보릿고개라는 말이 더욱 아련하게 다가온다.

봄이 되면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부녀자들은 산과 들에서 나물을 뜯어 죽을 쑤어 먹기 일쑤였고,시래기죽도 호구지책의 하나였다.

춘궁기를 지내기가 오죽 힘들었으면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고 했을까 싶다.

이토록 힘들었던 시기에 보리는 곧 희망이었다.

퇴약볕 아래 도리깨질로 보리타작을 하는 일도 힘들지 않았다.

보리피리는 끼니를 잊게 하는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기구이기도 했다.

보리이삭이 필락말락할 때,보릿대를 적당히 잘라 아랫부분을 입으로 한두 번 깨문 뒤 대롱을 불면 '피릴~리'하고 나는 소리가 여간 재밌지 않았다.

모든 곡식 중에서 재배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보리는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정력식품으로 동서양에서 사랑을 받아왔다.

로마시대에는 검투사들이 힘을 기르기 위해 보리를 즐겨 먹었다는데 '보리먹는 사람'이란 별명은 이런 연유에서 붙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보리만큼 풍부한 영양을 가진 곡물도 드문 것 같다.

우유와 시금치를 훨씬 능가하는 칼륨과 칼슘이 들어 있는가 하면,비타민C와 미네럴도 어느 식품 못지 않다.

특히 성인병을 예방하는 항산화효소가 다량 함유돼 일본에서는 보리녹즙이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웰빙식단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주요한 식량으로 대접받던 보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느새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보리재고가 쌓여 이제는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동안 당국은 생산을 줄이려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자,급기야 59년 만에 보리수매가를 낮추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재고과잉은 두말할 나위없이 수요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가 무공해식품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한다.

다이어트식으로도 이만한 식품이 없다고 영양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지금에 와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보리가 그 진가를 인정받으면서 또다시 우리들의 식탁에 귀한 손님으로 올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