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동북아 환율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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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
폴 볼커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굵은 뿔테 안경 너머 인자한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다.
한때의 음악학도였던 그린스펀에게 FRB 의장 자리를 물려준 사람.레이건 대통령과 적지 않은 갈등을 빚었지만 정책 금리를 무려 20%까지 밀어올리면서 '미국 전체'를 구조조정해냈다.
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시대를 마감하고 90년대 신경제에 바통을 넘긴 바로 그 주역.
우리가 볼커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도 벌써 추억 속의 일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까지 추어댔던 고이즈미가 잊혀지고 아베 신조 총리 시대가 온 지도 벌써 몇 개월이다.
그리고 일본의 부활을 노래하는 찬가가 울려퍼진다.
영국 총리 블레어를 부시의 푸들이라고 한다면 일본 총리들은 미국의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차마 말하기 어렵다.
푸들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일본 총리였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드디어는 10년 경기침체의 끝을 보고 있다.
교과서들은 일본의 긴 불황을 "과도한 부동산 투기와 거품 때문이었다"고 당연하다는듯 쓰고 있다.
그러나 한껏 부푼 풍선을 바늘로 찔렀던 사람이 바로 폴 볼커다.
팽창 계수가 한도에 이르렀던 바로 그때 날카로운 바늘을 들이댔다.
파열음과 함께 풍선은 터지고 말았고."도쿄를 팔면 미국 전부를 사들인다"던 시대였다.
영화사를 사들이고 마천루를 사들이고 그렇게 거품의 80년대를 즐겼다.
폴 볼커가 콜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면서 고통 속에 미국을 구조조정해 놓고 보니 빌딩이며 공장들이 엔화의 군침 도는 먹잇감으로 전락하였던 그 절정은 86년 즈음이었다.
하이에나가 구조조정의 사체들을 청소하는 것이야 말릴 이유가 없지만 거품으로 부풀려진 일본 자본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난 것도 그때다.
볼커의 은밀한 기획 3년 만에 나온 것이 국제결제망에 참여하는 대형 은행에 적용되었던 자기자본 비율,곧 BIS비율 규제였다.
"주식과 부동산 따위는 빼고 은행의 자기자본을 다시 계산하자"는 'BIS비율 8%'의 칼을 받고서야 일본 은행들의 거품의 바벨탑이 무너졌다.
주가는 4만엔에서 8000엔으로,지가는 반토막을 넘어 4분의 1 토막으로까지 자유낙하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잃어버린 10년이더라!" 하는 것이 일본 10년 불황의 내막이다.
미국의 푸들이면 어떻고 주막 강아지라는 비난을 받으면 어떻냐는 저간의 속사정은 이렇게 돌아갔다.
툭하면 환율 조작국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엔화 환율이 달러당 무려 79엔까지 밀려 내려갔던 것이 바로 아시아 외환위기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만한 95년 4월19일의 역사적인 기록이다.
속절없이 세계 질서에 순응하며 시간을 버는 것에 일본인들은 그렇게 이력이 났다.
또 그것으로서 얻고 있는 것이 경기회복에 아랑곳없이 '나홀로 엔화 약세'라는 눈물겨운 보상이다.
중국이 저다지도 덩치를 키워가고 있으니 미국의 후원 아래 경기회복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도 됐다.
내친 김에 헌법 개정도 추진해보고 샌프란시스코조약의 독도 조항까지 건드려 보았던 일본이다.
미 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일본은 거기까지만이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드러내놓고 "엔화 환율은 일본의 마음이고…"식이다.
미국의 일본 편애도 그렇지만 무정견에 속수무책인 원화만 고달픈 처지가 되고 말았다.
지난 주말 단행된 위안화 변동폭 확대도 속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늘 열릴 미·중 경제전략회의를 앞두고 중국으로서는 나름의 성의를 보인 셈이다.
금리와 지급준비율까지 동반 인상한 것도 중국통 폴슨의 요구를 그대로 따랐다.
중국은 그동안에도 미·중 정상회담같은 큰 행사를 앞두면 거의 반드시 선물을 준비해왔다. "기왕에 할 것,생색도 내면서"라는 전략이다.
"앞으로 30년 동안은 미국에 대들지 말라"는 것이 덩샤오핑(鄧小平)의 유훈이었다지만 한국은 그렇게 중국과 일본에 끼어 동북아 중심국가가 아니라 샌드위치로 전락하는 중이다.
동북아 골목길에서의 나라 경영도 그만큼 해먹기 어렵다.
한국의 대통령 후보를 자처하는 분들도 잘들 알고 계시겠지만.
폴 볼커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굵은 뿔테 안경 너머 인자한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다.
한때의 음악학도였던 그린스펀에게 FRB 의장 자리를 물려준 사람.레이건 대통령과 적지 않은 갈등을 빚었지만 정책 금리를 무려 20%까지 밀어올리면서 '미국 전체'를 구조조정해냈다.
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시대를 마감하고 90년대 신경제에 바통을 넘긴 바로 그 주역.
우리가 볼커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도 벌써 추억 속의 일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까지 추어댔던 고이즈미가 잊혀지고 아베 신조 총리 시대가 온 지도 벌써 몇 개월이다.
그리고 일본의 부활을 노래하는 찬가가 울려퍼진다.
영국 총리 블레어를 부시의 푸들이라고 한다면 일본 총리들은 미국의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차마 말하기 어렵다.
푸들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일본 총리였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드디어는 10년 경기침체의 끝을 보고 있다.
교과서들은 일본의 긴 불황을 "과도한 부동산 투기와 거품 때문이었다"고 당연하다는듯 쓰고 있다.
그러나 한껏 부푼 풍선을 바늘로 찔렀던 사람이 바로 폴 볼커다.
팽창 계수가 한도에 이르렀던 바로 그때 날카로운 바늘을 들이댔다.
파열음과 함께 풍선은 터지고 말았고."도쿄를 팔면 미국 전부를 사들인다"던 시대였다.
영화사를 사들이고 마천루를 사들이고 그렇게 거품의 80년대를 즐겼다.
폴 볼커가 콜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면서 고통 속에 미국을 구조조정해 놓고 보니 빌딩이며 공장들이 엔화의 군침 도는 먹잇감으로 전락하였던 그 절정은 86년 즈음이었다.
하이에나가 구조조정의 사체들을 청소하는 것이야 말릴 이유가 없지만 거품으로 부풀려진 일본 자본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난 것도 그때다.
볼커의 은밀한 기획 3년 만에 나온 것이 국제결제망에 참여하는 대형 은행에 적용되었던 자기자본 비율,곧 BIS비율 규제였다.
"주식과 부동산 따위는 빼고 은행의 자기자본을 다시 계산하자"는 'BIS비율 8%'의 칼을 받고서야 일본 은행들의 거품의 바벨탑이 무너졌다.
주가는 4만엔에서 8000엔으로,지가는 반토막을 넘어 4분의 1 토막으로까지 자유낙하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잃어버린 10년이더라!" 하는 것이 일본 10년 불황의 내막이다.
미국의 푸들이면 어떻고 주막 강아지라는 비난을 받으면 어떻냐는 저간의 속사정은 이렇게 돌아갔다.
툭하면 환율 조작국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엔화 환율이 달러당 무려 79엔까지 밀려 내려갔던 것이 바로 아시아 외환위기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만한 95년 4월19일의 역사적인 기록이다.
속절없이 세계 질서에 순응하며 시간을 버는 것에 일본인들은 그렇게 이력이 났다.
또 그것으로서 얻고 있는 것이 경기회복에 아랑곳없이 '나홀로 엔화 약세'라는 눈물겨운 보상이다.
중국이 저다지도 덩치를 키워가고 있으니 미국의 후원 아래 경기회복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도 됐다.
내친 김에 헌법 개정도 추진해보고 샌프란시스코조약의 독도 조항까지 건드려 보았던 일본이다.
미 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일본은 거기까지만이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드러내놓고 "엔화 환율은 일본의 마음이고…"식이다.
미국의 일본 편애도 그렇지만 무정견에 속수무책인 원화만 고달픈 처지가 되고 말았다.
지난 주말 단행된 위안화 변동폭 확대도 속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늘 열릴 미·중 경제전략회의를 앞두고 중국으로서는 나름의 성의를 보인 셈이다.
금리와 지급준비율까지 동반 인상한 것도 중국통 폴슨의 요구를 그대로 따랐다.
중국은 그동안에도 미·중 정상회담같은 큰 행사를 앞두면 거의 반드시 선물을 준비해왔다. "기왕에 할 것,생색도 내면서"라는 전략이다.
"앞으로 30년 동안은 미국에 대들지 말라"는 것이 덩샤오핑(鄧小平)의 유훈이었다지만 한국은 그렇게 중국과 일본에 끼어 동북아 중심국가가 아니라 샌드위치로 전락하는 중이다.
동북아 골목길에서의 나라 경영도 그만큼 해먹기 어렵다.
한국의 대통령 후보를 자처하는 분들도 잘들 알고 계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