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스님 < 남해 용문사 주지 >

길을 나서는데 아카시아 꽃향기가 날아와 앉는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그 향기를 맡는다.

향기는 내 어깨에서 코를 타고 들어와 심장에 머물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다시 지워지지 않을 향기로 자리한다.

눈을 감고 서서 살아있음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깨닫는다.

마음이 순해지고 그냥 모든 것을 다 사랑하고만 싶어진다.

꽃향기 하나가 건네는 의미는 그 어느 경전의 말씀보다도 그 순간 내게는 크게 다가온다.

도량(道場)에 서서 꽃향기가 내게 이렇게 아름다운 깨달음으로 오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부처님이 내게 보내는 전갈인가,아니면 전생 어느 시간에 내가 향기를 가진 꽃이었기 때문인가.

우리,수많은 생을 윤회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 거친 시간의 여행길에서 꽃이었다가 지금 인간의 몸을 받고 있다면 나는 시간의 거친 파고를 잘도 피해가며 살아온 셈이다.

내가 꽃이었을 적 나는 향기에 눈 먼 삶을 살았을 것이다.

늘 향기에 취해 살아온 삶.그래서 나는 아직 그 시간의 향기에 이토록 발길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인간인 이 시간의 자리. 향기는 없지만 향기보다 아름다운 감동이 있다.

때로 싸우고 때로 헐뜯고 때로 분노하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을 대할 때면 눈시울 뜨거워질 때가 많다.

거리에서 매장에서 농토 위에서,그리고 바다와 탄광에서 한줌밖에 안 되는 삶을 뜨겁게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할 때 삶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된다. 어려울수록 그 속에 자리한 사람들의 모습과 의지는 더욱더 빛난다.

어두워 좌판을 걷고 돌아가는 할머니,그리고 처진 어깨로 돌아와 자식들을 보고 싱긋 웃는 아버지들.그 모습들을 어떻게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있겠는가.

아픔과 고됨을 이겨내고 그들이 빚어가는 하루하루가 어찌 삶의 경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실을 떠난 경전이 없듯이 나는 그들이 하루하루 쓰는 경전을 읽을 때마다 삶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것이고 또한 얼마나 큰 감동인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부처님은 걸식을 하셨다.

맨발로 집집을 다니시며 당신의 끼니를 손수 얻어 드셨다.

부처님이 걸식을 나가 발우를 들고 대문 앞에 섰을 때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홀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걸식을 하셨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부처님은 걸식을 하셨다.

수치심도 없이 그냥 평등한 마음으로 걸식을 하셨을 뿐이다.

걸식을 한다는 것.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나라의 왕자였고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위대한 스승이 걸식을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것을 능히 하셨다.

그것이 삶의 진리를 실현하는 길이고 복을 짓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본래 자리에 돌아와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고 고요히 앉으셨다.

그 광경을 보고 부처님의 제자는 희유(稀有)하다고 찬탄한다.

그것은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신 부처님의 무언 설법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삶 전체가 설법이었다.

어느 한 순간도 삶의 진실과 진리를 벗어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탄생게(誕生偈)에서 설한 '삼계는 고해(苦海)이니 내가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는 그 약속의 실천이기도 했던 것이다.

부처님은 한번도 진리의 자리를 떠나시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언제나 진리 그 자리에서 진실한 모습만을 보이셨다.

부처님께 오고 간다는 윤회는 부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삶의 본래 자리를 이탈해 있는가.

허위와 다툼의 한가운데서 나를 주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너무 멀리 본래 자리를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 속에서 기쁨을 만난다면 우리 본래 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경전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부처다.

부처님 오신 날,우리가 만나는 꽃향기는 당신처럼 살라고 부처님이 보내는 메시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 부처님처럼 본래 자리에서 그윽한 자비의 향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보자.

/불교방송 '행복한 미소'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