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차 연극배우 C씨는 영화에도 종종 출연할 만큼 인지도가 높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 "다시는 연극판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학 때부터 함께 연극을 해온 선배의 부탁으로 공연에 출연해 성황리에 끝냈지만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 수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법적인 보호도 받을 수 없다.

대학로의 '관행'에 따라 계약서를 쓰지 않은 탓이다.

공연업계에 따르면 대학로에 올려지는 공연 중 50~70%는 계약서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단부터 기획사까지 90% 이상이 친분 있는 '형' '동생'들의 '동인' 개념으로 운영되다 보니 '계약서는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끼리나 쓰는 것'처럼 인식돼 있다.

실제로 극단 '악어'나 극장 '동숭 아트센터'와 같은 유명한 곳을 제외하고는 명문화된 계약서를 쓰는 곳이 거의 없다.

대학로의 극단 관계자들은 "구두로 배우에게 확인을 받고 공연을 진행하기 때문에 계약서가 없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배우들 입장은 다르다.

'갑'의 위치에 있는 극단과 기획사들은 흥행 실적이 안 좋을 경우 배우들의 출연료 지급을 미루거나 아예 나몰라라 하기 일쑤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배우들에게 돌아간다.

흥행에 성공하면 출연료를 받고 실패하면 못 받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일상화돼 있고,좁은 바닥에서 소문이라도 나쁘게 나면 향후 캐스팅에 영향을 미치므로 항의조차 못 한다.

계약서가 없으니 극단과 기획사 간 콘텐츠 저작권 분쟁도 생기고 있다.

대본만 갖고 연극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체험전 등 각종 콘텐츠로 승부하는 곳이 많아지면서 서로 베끼는 문화가 성행하는 것.

어린이 체험전 콘텐츠를 개발하는 아트창의력개발연구소의 김고영 관장은 현재 법적 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 연구소는 지난해 9월 극단 JT컬쳐와 '피카소와 함께 떠나는 미술여행'이라는 공연을 올렸다.

3000만원을 들여 극에 올릴 작품과 그에 대한 설명,극 구성까지 연구소에서 모두 만들었다.

이들도 관례에 따라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 극과 똑같은 공연이 이달 10일 롯데월드에서 '상상기발 피카소 미술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김 관장은 자신과 상의없이 콘텐츠를 다른 곳에 판 JT컬쳐에 항의했지만 "당신들도 다른 데서 극을 올리면 되지 않느냐"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그는 "연극도 제작 비용이 커지고 있는데 계약서 없는 관행이 계속된다면 이런 분쟁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홍종필 JT컬쳐 대표는 "'콘텐츠 도용'이라는 오해의 소지는 있을 수 있지만 롯데월드에 올린 공연은 대본 완성부터 제작비까지 모두 우리가 부담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