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다인종 사회여서 국가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게 보이지만,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놀라운 애국심을 발휘한다.

미국 심장부를 강타한 9·11테러 당시도 그랬다.

너도 나도 경쟁이라도 하듯 자동차에 성조기 스티커를 붙였고,미식축구나 농구장 모두도 성조기 일색이었다.

운동선수들도 유니폼에 성조기를 새겨 넣고 뛰었다.

'충성맹세(The Pledge of Allegiance)'도 다시 등장했다.

"나는 미합중국 국기와 그 국기가 상징하는,하나님의 보호 아래 나누어 질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롭고 정의로운 미합중국에 충성을 맹세합니다"라는 내용이다. 이는 1892년 침례교 목사인 프란시스 벨라미가 한 잡지에 발표한 것이다.

당시 이 충성맹세는 법정논란에 휘말려 있었다.

무신론자인 초등학교 학부형이 '하느님의 보호아래'라는 구절을 문제삼아,이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연방순회항소법원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규정하고 있는 수정헌법 1조에 위반된다고 판시하자,110년 동안 모든 공립학교에서 암송된 충성맹세가 위기를 맞게 됐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1972년부터 실시한 '국기에 대한 맹세'가 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국기에 대한 맹세의 문안이 '군사문화의 잔재''시대정신의 역행'이라며 논란을 빚어왔다.

미국과 달리 국민의 일방적인 충성만을 강요한다는 비판이 거셌다.

마침내 소관기관인 행자부가 문안을 수정키로 하고,홈페이지 등을 통해 일반인들로부터 맹세문에 대한 의견을 수렴키로 했다.

6월 중에 수정문안을 최종 확정할 계획인데 미래지향적이고 현대감각에 맞는 내용을 담는다고 한다.

유신시대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국기에 대한 맹세가 뒤늦게나마 수정된다는 것은 어쨌든 반가운 일이다.

이왕이면 붉은 악마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처럼 외칠 수 있는 문장으로 다듬어진다면 더욱 좋겠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