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종 비자코리아 사장은 35년 넘는 직장 생활 대부분을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보냈다.

1970년대 초 체이스맨해튼 은행(현 JP모건)에서 선진 금융 기법을 어렵게 익힌 덕분에 몸값이 올라 항상 마음에 드는 직장을 골라 다니는 행운을 누렸다.

금융회사에서,그것도 까다로운 외국 금융사에서 오래 근무했다면 원리원칙만을 따지는 깐깐한 캐릭터일 것 같지만 김 사장의 어투에서는 오히려 젊은 시절 반항아적 기질이 짙게 배어 났다.

"미군 첩보부대에 들어가 영어를 익혔고 미국 연수(체이스맨해튼) 땐 미국 애들한테 지지 않으려고 '깡'으로 공부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힘들 때마다 "애비 없는 호래자식 소리 들으면 안 된다"는 서른 넷에 과부가 된 어머니의 당부가 버팀목이 됐다.

보통 사람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자기 최면으로 살아 온 김 사장.그래서인지 그가 네 시간 동안 풀어낸 이야기 보따리에는 서양 스타일의 합리성보다는 한국적인 정서가 넘쳐 흘렀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누구보다 화려한 글로벌 역량을 펼쳐 온 김 사장을 정동의 한 맥주집에서 만났다.


▶▶한경 기자들과 4시간 솔직 토크


-영어는 네이티브 수준이시겠습니다.

“저는 아니고 아이들이 그런 편이죠. 큰놈이 딸이고 작은놈이 아들인데 자기들끼리는 영어를 씁니다. 예전엔 애들이 아빠한테 영어로 말을 건넸다고 세 시간씩 벌을 세우곤 했는데 요즘엔 제가 영어를 까먹을까 봐 아이들에게 영어로 말을 겁니다.(웃음)”

-영어를 잘하셨으니 외국계 금융사에 들어가신 것 아닙니까.

“유학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에서 영어를 배웠지요. 돌이켜보면 어머니 덕분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저를 성공회교회로 보내 영국인 신부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했으니까요. 고등학교 때 평화봉사단을 안내하는 모임을 만들어 거기서 가이드 역할을 했어요.이것 말고는 순전히‘깡’이지요.”

-깡으로 영어를 배워요?

“진짜 영어 공부를 한 곳은 군대입니다.1966년 미군 첩보부대에 들어가 미군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통역하는 일을 맡았습니다.미군들이 한국군을 불신한 탓에 한국인 수를 최소화해 150명 중 20명에 불과했죠.한국군을 변호하고 한국군을 믿지 않는 미군들에게 하도 욕을 해대다 보니 자연스레 영어가 늘었습니다. 군대에서 'f'로 시작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썼던지…다른 건 몰라도 욕은 원어민한테도 결코 지지 않을 겁니다.”

-그곳엔 어떻게 가게 됐죠?

“어머니가 무척 강한 분이셨어요.그 당시엔 아무나 그런 군대에 갈 수 없었는데 동대문에서 포목 장사를 하신 어머니가 무슨 수를 썼는지 저를 그곳에 보내더라고요. 고급 영어를 배운 것은 체이스맨해튼 미국 본사에서 일하면서였지요.영어를 잘하려면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외국계 회사를 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회사에 다닐 기회가 없진 않았습니다.국내 굴지의 그룹에서도 같이 일해 보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고요. 한국 회사는 눈치를 많이 보면서 근무해야 할 것 같아 좋은 조건의 스카우트 제의를 대부분 거절하곤 했습니다. 룰을 깨는 게 제 스타일인데 한국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로열 패밀리도 아니고 오너들 측근도 아니니까요. 외국 회사에서 근무하니 지금도‘폼’을 잡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나이 60을 넘겨서도 열심히 일할 수 있으니 외국 회사에 들어간 게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체이스맨해튼 은행에 입사한 것이 1971년이던데요.

"1년간 열심히 일하니 노조위원장을 하라고 하더군요. 당시 국내 물가상승률이 연간 30~40%인데 미국 본사와 똑같이 급여를 3~4% 인상한다고 해서 단체행동을 했습니다. 씨티은행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외국계 은행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 500원을 내고 계좌를 튼 다음 바로 돈을 빼내는 방식으로 준법 투쟁을 벌였죠.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그렇게 노조위원장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1975년 미국 본사 연수를 가는 시험이 있다고 해서 봤습니다. 거기서 1등을 했습니다. 동양인의 미국 본사 연수는 처음이었습니다.연수를 마치고 1978년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기업금융 전문가로는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더군요. 규제가 너무 많았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규제 투성이였어요. 여기 있다가는 버리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본사 근무 지원을 했는데 덜컥 되더군요.스트리트에‘토종 한국인’은 없을 때입니다."

-미국 연수 때나 본사에 근무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뭔가요.

체력이지요. 뭐든 악발이처럼 열심히 하는 데는 자신이 있는데 체력만큼은 미국 애들을 당해내지 못하겠더라고요. 처음 미국에서 연수받을 때 미국 애들한테 안 지려고 매일 햄버거만 먹고 공부하다 만성 위염에 걸렸습니다. 토론할 때 예를들어 설명하는 능력이 부족해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케이스스터디 문화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잖아요.생소한 용어 때문에도 고생 많았습니다. 미국 아이들이 근본적으로 동양인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어쩔 수 없었고…. 사실 한국인이 미국에서 주류 사회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미국 사람들을 강하게 상대했습니다.‘싸움꾼’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실적이 커버해 줬고,동·서양 문화를 모두 경험했다는 점을 장점으로 만들었지요.나중엔 저를 겁내더라고요.”

-미국에서 록펠러 회장의 수행 비서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수행 비서는 아니었고 자주 같이 다녔었습니다.1979년 당시 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이 데이비드 록펠러라는 분이었는데 록펠러 3세의 막내 아들이죠.저는 회장 직속 여신감찰부(Credit audit department)에 있었어요. 여신감찰부 사람들은 문제가 심각한 대출처에만 암행 감찰을 나가죠.체이스가 푸에르토리코에서 3억4000만달러 사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푸에르토리코 정부 쪽 변호사와 회계사가 짜고 대출받아서 버진아일랜드로 도망을 간 거죠. 치외법권 지역 같은 곳이어서 잡을 수가 없었는데 제가 비리의 원천과 배경을 분석해서 푸에르토리코 정부로부터 6500만달러 정도를 받아냈습니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젓던 걸 해냈으니 영웅이 됐죠. 회장 직속인 감찰부 사람이 해 내니까 록펠러 회장이‘한번 그 사람 올려 보내 봐라’한 거죠. 그 이후로 3년 동안 한국이나 외국에 나갈 때 10여 차례 함께 다니며 일했습니다.”

-미국 생활은 어땠나요.

“국제 자본시장에서 주식과 채권의 중간 형태인 워런트를 발행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이 상품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브리지 역할을 하기도 했고요.돌이켜보면 동양인이라고 괄시를 많이 받기도 했지만 체이스맨해튼에서 일했던 시절은 저에겐 참‘파이어니어적 시절’이었습니다.”

-인생의 황금기였겠습니다.

"황금기는 1985년 홍콩에 있을 때였습니다. 투자은행(IB) 팀에서 채권 담당을 맡았는데 그때는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정도였지요. 금성사(현 LG전자)가 전환사채(CB)를 발행하자 금리가 좋다며 투자자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었습니다. 달러화가 남아도는 일본 보험사들이 저한테 로비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목에 힘도 많이 줬고 융숭한 대접도 한껏 받았지요. 그러다 1986년 홍콩에 있는 체이스맨해튼 투자금융의 사장이 됐습니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았습니다. 지나치게 폼을 많이 잡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의 보너스도 받았고요."

-그런데 왜 다시 한국에 들어오셨나요.

"가만히 보니까 아이들이 서양애들이 돼 가는 것입니다. 한 번은 딸 아이가 파티에 가는데 이상하게 화장을 하고 가기에 당장 지우라고 하니까 딸이 '아빠는 불공평(unfair)하다'고 하더군요. 아빠가 말하는데 무슨 공평,불공평 얘기를 하나 싶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글로벌하게 키우고는 싶었어도 서양아이들로 키울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제가 고려대를 나왔는데 외국에서 살면서도 그런(동문들의 끈끈한 도움)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애들도 고등학교 대학은 한국에 기반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녀들의 문화적 충격이 컸을 텐데요.

"아이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딸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둘 다 월요일만 되면 설사를 하고 학교를 못가겠다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도 잘 이겨냈어요. 딸이 얼마 전 저를 보고 자신을 '바이컬처럴(bicultural)'하게 키워줘서 고맙다며 회사에서 받은 보너스를 몽땅 건네주더군요. 눈물이 납디다. 오히려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내가 고마울 뿐인데요."

-금융 분야를 전부 섭렵하셨던데요.

"국내에 들어와 푸르덴셜생명과 동아증권을 거쳐 지금 비자코리아에 있으니 체이스맨해튼까지 합하면 총 4군데를 다녔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성장하는 분야만 다녔습니다. 그만큼 다양하고 좋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경험을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는 부담을 늘 갖고 있습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벌일 때 금융 분야 자문을 맡았던 것도 그런 취지였지요. 한국 측 금융 분야 협상 대표들이 정말 잘해줬다고 생각합니다."

-회사 생활에서 가장 괴로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한국에 있으면서 노조와 싸웠던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당시 노조들은 임금 인상이나 복지 문제가 요구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이념적인 문제였지요. 매일 집 앞에서 징과 꽹과리를 치고 난동을 피워 호텔을 전전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도 어떻게 알고 끝까지 따라다니던지….노조는 (외국 금융사가) 한국에서 철수하라며 투쟁을 벌이는데 본사에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3년6개월을 견뎠습니다. 홍콩에 있을 때 중국 광둥성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의 펀딩을 맡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도 힘들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 전이어서 비자가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고,간신히 방문 지역을 제한하는 비자를 받아 입국했다가 회의가 다른 지역에서 열려 참석조차 할 수 없었지요. 체이스맨해튼 내부에선 중국 관련 딜에는 앞으로 한국 사람을 넣지 말라는 얘기까지 나왔죠.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한국 금융산업의 문제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노조를 빼놓을 수 없고…. 조직이 아직도 경직돼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규제가 가장 큰 문제이고요. 만약 '금융월드컵'이 열린다면 우리나라는 본선진출도 어려울 것입니다. 베컴이 있다고 해도 심판이 자꾸 호루라기를 불어대면 어디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한국 정부는 호루라기를 너무 많이 붑니다.민간 금융산업을 여전히 제도 금융의 한 축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CEO를 오래 하시면서 터득한 노하우라면….

"전 직원들에게 항상 '바지를 벗어 거꾸로 털어 나오는 것은 모두 돈이 된다'고 말합니다. 돈을 벌고 싶으면 모든 걸 뒤집어 생각해 보라는 뜻이지요. 푸르덴셜에 있을 때도 항상 반대로 해온 게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다른 회사는 여성 보험판매원을 뽑을 때 저는 보험판매원으로 남성만 채용했습니다. 자기 집이나 친척 중에 보험판매원이 있으면 절대 뽑지 않았습니다. 남자만 뽑으니까 (대학 동기인) 배정충 삼성생명 사장이 '미국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돼 네가 잘 몰라서 그런다'며 충고하더군요. 그런데 그 모델이 성공했습니다.당시에 LP(Life Planner)라는 명칭은 특허등록을 해서 아직도 푸르덴셜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 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전 결코 슈퍼맨을 원하지 않습니다. 슈퍼팀을 원할 뿐입니다. 모든 직원들이 재미나게 살 수 있는 조직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8년간 비자에서 일하면서 3명을 해고했습니다. 헛소문을 퍼뜨리고 남을 모함하는 사람들이었죠.두 번까지 봐줬지만 세 번째는 '삼진아웃'시켰습니다. 정말 유능한 사람도 있었지만 조직에 반목의 요소를 만드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CEO로서 가장 어려운 일은 부하 매니지먼트라고 생각합니다.전 다행히 인복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제가 홍콩에 있을 때 사환을 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똑똑한 것 같아서 비서를 시켰습니다.이 친구가 서류를 넘겨주면서 '이 딜은 하세요.이 딜은 하지 마세요'하는 것입니다.처음에는 무시했는데 정말 그 친구 말대로 되는 것입니다.급사를 하면서도 서류를 보면서 노하우를 쌓아온 거지요.그 친구를 정직원으로 채용해 일을 맡겼습니다.지금 BNP파리바의 IB부문 홍콩대표가 바로 그 친구입니다."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적자생존'입니다. 적는(메모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 정확한 기록 없이는 아무런 일도 이뤄질 수 없지요. 지금도 직원들에게 반드시 메모하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저는 지난 20여년간 사용한 노트를 아직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요. 네 칸의 서랍을 빼곡히 채운 그 기록들을 읽어볼 때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구나 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컴퓨터 파일로 전환했으면 좋겠는데 대부분 영어인 데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글씨여서….나중에 자서전이라도 쓸 기회가 있다면 유용하겠지요."

정리=정인설/황경남/사진=허문찬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