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디자이너] 헤어디자이너 박 준 뷰티랩 원장 "아직도 커트에 미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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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스타일은 첫 인상의 70%를 좌우할 정도로 의상보다 영향력이 큽니다.
다른 디자인에 비해 스타일 변화에 대한 반응도 아주 빨라 늘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죠."
헤어디자이너 박준씨(55)에게 고객 한 사람,한 사람은 작품이다.
"헤어 디자인은 고객과 1 대 1로 마주하면서 이뤄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항상 서비스 마인드가 필요해요.
고객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눈이 있어야 만족스러운 헤어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지금이야 '헤어 디자이너'란 표현이 익숙하지만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용사'로 통했다.
"무슨 남자가 할 게 없어서 미용사를 하나?"
박씨가 1972년 당시 '금남(禁男)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미용계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그의 이름 뒤에는 전국 100여개의 '박준 뷰티랩' 체인망을 가진 CEO,박준뷰티아카데미 대표이사, 원광대 뷰티디자인학부 교수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가 미용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스물두 살 시절,길을 지나다 미용실을 보고 문득 '남자도 해보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됐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안 해본 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였다.
"무작정 미용실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원장님이 선뜻 받아 주시더군요." 그때부터 낮에는 미용실에서 일을 배우고,저녁에는 야간 미용학원을 다니면서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지금은 남자 헤어 디자이너들이 많지만,당시 남자 미용사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저한테 맡기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심지어 1981년 '뉴욕IBS 국제 헤어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여권을 만들 때도 "남자가 무슨 미용대회를 나가느냐"며 여권 발급이 거부되는 바람에 대회 하루 전날 겨우 미국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1주일 전에 도착해 연습도 하고 준비를 했는데 저는 바로 대회에 나갔어요.
그래도 운이 좋아서 3위에 입상했지요." 당시의 부정적인 시선이 오히려 원동력으로 작용해 그를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신선함,새로운 것에 대해 늘 고민한다.
'뿌리 퍼머' '유니섹스 스타일' '내추럴 퍼머' 등 다양한 기법을 개발해 헤어 스타일의 유행을 선도했다.
"1982년 9월 모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헤어쇼를 진행했었죠.해외 토픽 사진 한 장을 보고 연출해 봤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이 장면이 방송을 타면서 헤어디자이너 '박준'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계속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면서 남성 전용 미용실,아이 전용 미용실을 여는가 하면 2000만원짜리 헤어 시뮬레이션 기기를 도입하는 등 늘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등을 돌아다니며 해외 무대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모스크바,베이징,런던,밴쿠버에서 헤어쇼를 개최했다.
또 비달사순 아카데미같은 세계적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자신의 역량을 갈고 닦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LA 비달사순 아카데미에 들어가서는 헤어 커트에 미쳐 지냈지요.
2주 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커트만 연구했어요.
지금도 커트하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비달사순 아카데미는 하루 공부하는 데만 100만원이 들 정도로 수업료가 비싼 곳이지만,그는 그동안 번 돈을 다 쏟아 부을 정도로 커트 전문가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헤어 디자이너로서 가장 닮고 싶은 모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달사순이다.
"비달사순은 헤어 디자이너가 이룰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다 이룬 사람이에요.
헤어 살롱,인재 양성교육,헤어제품 사업 세 가지를 다 해냈지요.
저도 조금씩 닦아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100여개가 운영되고 있는 박준 뷰티랩을 200여개로 늘리고,현재 시중에 나와있는 40여 가지 헤어케어 제품을 널리 보급시키는 게 그의 목표다.
후배를 양성하는 활동도 활발히 펼쳐 나가고 있다.
그는 매년 11월 '박준 패밀리데이' 행사를 열어 박준 뷰티랩에서 활동하는 3000여 명의 '가족'들을 모아 놓고 헤어쇼를 진행한다.
"이날은 헤어 디자인 대회를 통해 박준 뷰티랩의 아트팀원 1명을 뽑는 중요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는 현재 13명으로 구성된 아트팀을 이끌고 올해를 주도할 헤어 트렌드를 연구하고 있다.
이런 부단한 노력은 '제1회 미용인 대상 작품부문 공로상' 'KOREA.COM 사이버 명예의 전당 최고 헤어디자이너 추대' 'ETICA TOP 헤어스타일리스상' 등의 결실을 맺게 했다.
"전 지금도 새로운 것을 연구해요.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에 민감하게 움직이다 보면 감각은 유지할 수 있거든요." 그는 아직도 사무실에 마네킹을 가져다 놓고 커트 연습과 헤어스타일 연구를 한다.
또 매주 수요일은 서울 청담동 숍에 나가 고객들의 머리를 직접 시술하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고객이 원하는 날까지 계속 가위를 들고 있을 거예요."
글=안상미 기자 saramin@hankyung.com/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다른 디자인에 비해 스타일 변화에 대한 반응도 아주 빨라 늘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죠."
헤어디자이너 박준씨(55)에게 고객 한 사람,한 사람은 작품이다.
"헤어 디자인은 고객과 1 대 1로 마주하면서 이뤄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항상 서비스 마인드가 필요해요.
고객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눈이 있어야 만족스러운 헤어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지금이야 '헤어 디자이너'란 표현이 익숙하지만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용사'로 통했다.
"무슨 남자가 할 게 없어서 미용사를 하나?"
박씨가 1972년 당시 '금남(禁男)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미용계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그의 이름 뒤에는 전국 100여개의 '박준 뷰티랩' 체인망을 가진 CEO,박준뷰티아카데미 대표이사, 원광대 뷰티디자인학부 교수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가 미용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스물두 살 시절,길을 지나다 미용실을 보고 문득 '남자도 해보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됐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안 해본 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였다.
"무작정 미용실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원장님이 선뜻 받아 주시더군요." 그때부터 낮에는 미용실에서 일을 배우고,저녁에는 야간 미용학원을 다니면서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지금은 남자 헤어 디자이너들이 많지만,당시 남자 미용사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저한테 맡기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심지어 1981년 '뉴욕IBS 국제 헤어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여권을 만들 때도 "남자가 무슨 미용대회를 나가느냐"며 여권 발급이 거부되는 바람에 대회 하루 전날 겨우 미국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1주일 전에 도착해 연습도 하고 준비를 했는데 저는 바로 대회에 나갔어요.
그래도 운이 좋아서 3위에 입상했지요." 당시의 부정적인 시선이 오히려 원동력으로 작용해 그를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신선함,새로운 것에 대해 늘 고민한다.
'뿌리 퍼머' '유니섹스 스타일' '내추럴 퍼머' 등 다양한 기법을 개발해 헤어 스타일의 유행을 선도했다.
"1982년 9월 모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헤어쇼를 진행했었죠.해외 토픽 사진 한 장을 보고 연출해 봤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이 장면이 방송을 타면서 헤어디자이너 '박준'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계속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면서 남성 전용 미용실,아이 전용 미용실을 여는가 하면 2000만원짜리 헤어 시뮬레이션 기기를 도입하는 등 늘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등을 돌아다니며 해외 무대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모스크바,베이징,런던,밴쿠버에서 헤어쇼를 개최했다.
또 비달사순 아카데미같은 세계적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자신의 역량을 갈고 닦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LA 비달사순 아카데미에 들어가서는 헤어 커트에 미쳐 지냈지요.
2주 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커트만 연구했어요.
지금도 커트하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비달사순 아카데미는 하루 공부하는 데만 100만원이 들 정도로 수업료가 비싼 곳이지만,그는 그동안 번 돈을 다 쏟아 부을 정도로 커트 전문가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헤어 디자이너로서 가장 닮고 싶은 모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달사순이다.
"비달사순은 헤어 디자이너가 이룰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다 이룬 사람이에요.
헤어 살롱,인재 양성교육,헤어제품 사업 세 가지를 다 해냈지요.
저도 조금씩 닦아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100여개가 운영되고 있는 박준 뷰티랩을 200여개로 늘리고,현재 시중에 나와있는 40여 가지 헤어케어 제품을 널리 보급시키는 게 그의 목표다.
후배를 양성하는 활동도 활발히 펼쳐 나가고 있다.
그는 매년 11월 '박준 패밀리데이' 행사를 열어 박준 뷰티랩에서 활동하는 3000여 명의 '가족'들을 모아 놓고 헤어쇼를 진행한다.
"이날은 헤어 디자인 대회를 통해 박준 뷰티랩의 아트팀원 1명을 뽑는 중요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는 현재 13명으로 구성된 아트팀을 이끌고 올해를 주도할 헤어 트렌드를 연구하고 있다.
이런 부단한 노력은 '제1회 미용인 대상 작품부문 공로상' 'KOREA.COM 사이버 명예의 전당 최고 헤어디자이너 추대' 'ETICA TOP 헤어스타일리스상' 등의 결실을 맺게 했다.
"전 지금도 새로운 것을 연구해요.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에 민감하게 움직이다 보면 감각은 유지할 수 있거든요." 그는 아직도 사무실에 마네킹을 가져다 놓고 커트 연습과 헤어스타일 연구를 한다.
또 매주 수요일은 서울 청담동 숍에 나가 고객들의 머리를 직접 시술하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고객이 원하는 날까지 계속 가위를 들고 있을 거예요."
글=안상미 기자 saramin@hankyung.com/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